Roza. Kei (로자 K) 블로그 위치로그  |  태그  |  방명록
삶문화와 공통어문제(조정환)
문화관련 글들(ktp) | 2007/06/12 23:56
 

6월민주항쟁20년기념 대토론회



주최 및 주관 :

공동 기획 및 진행 : 문화단체


    삶문화와 공통어 문제


조정환 (문학평론가, 「실천문학」 편집위원)




1. 머리말


부모들이 자신의 아이들에게 혀 밑의 얇은 조직을 절개하는 수술(이른바 ‘설소대절제술’(舌小帶切除術))을 강요하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혀 절제 수술을 하면 영어발음이 좋아진다는 이유로 수술이 강요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학교에서 학원으로, 가정에서 직장으로, 국내에서 국외로 이어지는 현대 영어교육의 일부임이 분명하다. 영어 조기교육의 논리는 초등학생은 말할 것도 없고 유아들의 삶에 부과하기 시작했고, 영어를 배우기 위한 조기유학은 뒤지지 않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교육과정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영어 능력 검증은 학교 시험이나 대학 수능평가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대학원들은 입학과 졸업논문제출 자격에 반드시 영어능력을 포함시키며 일부의 대학원들은 자연과학은 말할 것도 없고 인문과학에서조차 영어로 된 논문에만 학위를 수여한다. 유학을 위한 학문영어 시험인 TOEFL, 일상 및 업무를 위한 영어 능력 시험인 TOEIC, 그리고 이 양자를 겸한 TEPS 등으로 다양화된 영어능력 시험들은 영어를 영원히 넘어설 수 없는 문제이자 문턱으로 만들어 놓는다. 요컨대 영어능력은 학업의 척도이자 입학의 척도이고 취업의 척도로서 궁극적으로는 인간으로서의 능력을 가늠하는 척도로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의 문화적 현상들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다. 우리 삶의 매우 큰 부분이 영어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것으로 배치되면서 영어교육 시장은 거대 시장이 되었고 영어적 소통은 한국어적 소통을 압도할 것처럼 거센 물결로 되고 있다. 상점 간판들이 영어로 바뀐 지는 오래며 상품의 이름들, 심지어 책 제목조차 직접 영어로 지어지고 있다. 영화, 가요, 신문,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프로그램 등 대중적으로 향유되는 문화상품들 속에서 영어는 필수불가결한 구성부분이다. 인터넷 정보의 80% 이상이 영어로 되어 있다. 점점 영어가 지배적 문(文)으로 되면서 문맹은 한글능력이 아니라 영어능력에 의해 결정된다. 영어를 말할 수 없는 사람은 문화적 불구자, 즉 반귀머거리에 반벙어리로 취급된다. 이러할진대 영어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혀 수술을 마다할 일이 아닌 것이다. 필요하다면 좌우반구로 나누어 언어능력을 관리한다는 두뇌까지 수술해야 할 형편이 아닐까?

영어공용론은 영어를 우리 삶과 신체조직 속에 강제로 (그래서 마침내 무의식적 자발성의 방식으로) 각인하는 이러한 역사적 상황의 논리적 연장이자 그 정점이다. 복거일은, 중립적 제목 속에 영어공용론을 감추어 두었던 [국제어 시대의 민족문제](1998)에서와는 달리, [영어를 공용어로 삼자](2003)는 선동적이고 도발적인 제목 하에서 영어공용론을 펼친다. 그의 노골화된 영어공용론은 점점 심화되어 가는 영어 편집증에 불을 지피면서 영어능력 향상의 전국적이고 공공적인 방안으로 제시된다.


이 방안(영어공용-인용자)은 당장 우리 시민들이 영어에 들이는 투자를 보다 효율적으로 만들 것이다. 지금 우리 시민들은 영어를 배우는 데 엄청난 자원을 쓰는데, 안타깝게도, 그런 투자의 효율은 아주 낮다. 근본적 원인은 우리 시민들에겐 영어를 일상적 활동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익힐 기회가 없다는 사실이다. 어린 아이들이 일상적 활동들을 통해 언어를 자연스럽게 익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영어를 공용어로 삼으면, 우리 시민들은 영어가 일상적으로 쓰이는 환경에서 영어를 쉽고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다. 이 방안이 지닌 또 하나의 장점은 그것이 기회의 평등에 이바지한다는 점이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비싼 수업료를 내면서 영어학원에 자식들을 보내고, 적잖은 사람들이 자식들을 해외로 유학을 보낸다. 물론 그들은 재산이 넉넉한 계층이다. 영어가 이미 생존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기술이 된 터라, 그런 사정은 부의 세습을 뜻한다. 영어를 공용어로 삼으면,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영어를 배우는 기회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정부도 영어교육에 투자를 더 많이 하게 되어, 교육 기회의 불평등은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1)


국가를 영어학원화하며 사회를 영어마을로 만들고 소통적 삶 전체를 영어에 결박시킴으로써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영어를 유일의 공용어로 삼는 것, 지금 사용되는 ‘조선어’의 사멸을 촉진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고를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안은 영어를 우리말과 함께 공용어로 삼자는 것이다. 그렇게 두 가지 공용어들이 쓰이면, 우리 시민들은 자식들에게 영어와 조선어 가운데 하나를 골라 모국어로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의 영어의 확산과정이 시민들이 바라는 속도로 자연스럽게 진행될 것이다. 이 방안은 국제어를 유일한 공용어로 삼는 일의 첫 단계이면서도 조선어의 습득에 큰 투자를 했고 조선어에 큰 애착을 지닌 우리 시민들의 심리적 저항을 크게 받지 않을 것이다.2)


조선어는 사멸할 것이다. 이것은 민족어들의 궁극적 쇠멸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이것에는 ‘회의나 예외’3)가 있을 수 없다. 영어는 이중 언어 사용이라는 과도기를 거쳐 대부분의 나라의 유일 공용어로 자리 잡을 것이다.4) 복거일의 이러한 주장을 ‘몽상’이라고 단정해 버리는 것(조동일)은 문제의 핵심을 덮어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늘날 한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에서 일고 있는 영어 득세의 현실적 경향을 실증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근대로의 이행기에 일본이나 조선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소수 엘리트들의 계몽주의적 영어공용론 같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영어에 대한 욕망은 ‘시민들’의 대중적 욕망으로 내면화되어 하루하루의 삶을 규율하는 의식과 습관과 문화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복거일이 자신의 영어공용화론을 어떤 계몽적 어법도 빌지 않고 ‘시민들이 바라는’ 것의 ‘자연스러운’ 진행에 다름 아닌 것으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은 영어의 유일 언어화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자연법칙처럼 느껴지게 된 현금의 언어문화적 상황 때문일 것이다.

영어가 인간능력 측정의 절대 척도로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자신의 언어들을 버리고 습득해야 할 절대 언어로 받아들여지는 이 문화적 상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에게 과연 다른 문화적 가능성이, 다른 언어적 대안이 남아 있는 것일까? 만약 그러한 가능성과 대안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 것일까?




2. 근대와 언어


가. 언어와 창조, 그리고 생명 진화

우리에게 언어 문제가 화급한 문제로 대두되어 있음을 외면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것이다. 도대체 언어가 무엇이기에 우리가 피할 수 없는 문제로 던져져 있단 말인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언어는 정보전달의 수단이라거나 의사소통의 수단이라는 정의를 가지고 언어 문제를 다룬다. 복거일의 영어공용론이 특히 그렇다. 분명히 언어는 지시하고 전달하고 소통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하지만 왜 우리는 언어를 통해 지시하고 전달하고 소통하는가? 삶의 변형을 가져오기 위해서다. 삶을 다르게 창조하기 위해서다. 지시와 전달과 소통은 창조와 변형을 위한 계기들일 뿐이다. 언어는 인간이 새로운 삶을 열어나가는 비물질적 기술인 동시에 의식의 비물질적 신체이다.


인간은 단지 자신의 기계를 유지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용하기에 이른다. 그는 아마도 이런 일을 두뇌의 우월성에 힘입고 있을 것이다. 두뇌는 인간에게 무한수의 운동기제를 만들게끔 해 주고 새로운 습관들을 끊임없이 과거의 습관들에 대립시키며 자동성을 자기 자신에 맞세워 분해하면서 그것을 지배하게 해 준다. 인간은 이런 일을 언어에 빚지고 있다. 언어는 의식에 비물질적 신체를 제공하여 거기서 자신을 구현하고 그렇게 해서 의식으로 하여금 물질적 신체에만 의존하지 않을 수 있게 해 주는데, 물질적 흐름은 처음에 의식을 끌고 가서는 곧 삼켜 버릴 수도 있었다. 또한 인간은 위와 같은 일을 사회적 삶에 빚지고 있다. 언어가 사유를 저장하듯이 사회적 삶은 노력을 저장하고 보존한다. 그렇게 해서 사회적 삶은 평균 수준을 고정하여 개인들로 하여금 단번에 거기로 올라하게 하고 이런 최초의 자극에 의해 평범한 사람들이 잠들지 않게 하고 탁월한 자들은 더 높이 올라하게 해 준다. 그러나 우리의 두뇌와 사회 그리고 언어는 단 하나의 동일한 내적 우월성이 외적으로 다양하게 나타난 기호들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생명이 주어진 순간에 진화로부터 획득한 유일하고도 예외적인 성공을 말해준다. 그것들은 인간을 나머지 동물과 구분해 주는 본성의 차이를 나타내며 단순한 정도차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로부터 우리는 생명 도약의 발판이 된 넓은 점프대 끝에서 다른 모든 것들은 팽팽하게 당긴 줄이 너무 높다고 생각하여 내려와 버린 반면에 인간만이 장애물을 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5)


생명체로서의 인간은 한편에서는 두뇌와,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와 연결된 언어를 통해 삶을 새롭게 창조해 나간다. 정보와 전달 그리고 소통은 이 창조 과정의 기능적 계기들일 뿐이다.6) 그러므로 새로운 언어의 문제는 사실상 새로운 의 문제이다. 오늘날 언어의 변형이 문제로 되고 있다는 것은 새로운 삶을 창조하기, 진화의 길을 개척하기, 요컨대 봉착한 장애물을 통과하기가 문제로 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 언어와 권력

그런데 사회에서 도구나 재화보다 사회체라는 기계적 배치물이 우선하듯이 언어에서도 랑그나 단어보다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이 우선한다.7) 기호계의 이 집단적 배치물은 크게 보아 질적으로 구분되는 두 가지 벡터, 성분, 노선이 갈등하는 장(場)이자 일종의 블록이다. 한편에는 생명의 창조적 약동과 창조적 협력의 잠재적 성분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주객 분리의 구조를 만들어 내고 변수를 상수로 고정시키며 창조를 명령에 종속시키는 현실적 성분이 있다. 전자는 후자와 혼합되고 또 그것에 의해 침식된다. 요컨대 언표행위의 집단적 배치물은 언어활력이 언어권력으로 응고되는 한편 다시 언어권력이 언어활력의 특이한 추상기계에 의해 균열되면서 갈등적으로 구성되는 일종의 역사적 블록이다.8)

공용어(oficiala lingvo)는 응고, 상수, 표준의 집대성이다. 그것은 방언들, 소수어들을 타파하고 흡수하면서 성장하는 중앙집권적 언어이다. 그래서 공용어는 흔히 국어(nacia lingvo)로 정립된다. 공용어로서 국어가 갖는 가장 중요한 기능은 공동의 언어를 사용하는 통합된 국민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국가는 어떤 장치들을 사용하는가? 우선 문법을 확립하고 체계화해야 한다. 문법은 소수어적 가능성을 봉쇄한다. 언어생활과 사유가 정해진 코드 위에서 전개되도록 만드는 핵심적 장치이다.9) 여기에 어휘의 표준화가 덧붙여짐으로써 표준문법을 갖춘 표준어 체계가 구축된다. 둘째로 표준어의 교육이 필수적이다. 국어는 초등, 중등, 고등 전 교육과정의 필수과목으로 삽입되며 능력 측정의 척도로서 기능한다. 셋째로 국어 과목 교육만으로는 부족하다. 모든 과목이 이 표준어로 교육되어야 한다. 외국어조차도 국어로써 교육됨으로써 국어의 주권은 확고해진다. 넷째 표준어는 입법, 사법, 행정 등에 걸친 전 정치영역의 공적 언어로 자리 잡는다. 중앙집권적 행정체계는 표준어의 작동공간으로, 다시 말해 언어적 명령체계로 기능한다. 다섯째로 표준어는 노동어로서 사용된다. 공장과 사무실에서 표준어는 작업상의 협력을 위한 공동언어로 사용된다. 여섯째 표준어는 문화언어로서 문예창작과 신문방송의 기본언어로 사용된다. 이렇게 다방면적으로 구축된 표준어 체계를 통해서 사람들은 공동의 언어망에 연결된 국민으로 양성된다. 이 공동의 언어망 위에서 사고방식, 감정체계, 행동양식의 공동성이 형성되어 공용어로서의 국어는 마치 자연의 산물인 것처럼 개개인들의 뼈 속 깊숙이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국어는 언어에 의해 표현된 개별 이데올로기에 앞서는 국가의 모반(매트릭스)이며 국민적 충성심, 애국심, 민족성 등 국민통합을 위한 정서형태들의 깊은 원천이다. 이 자발성의 정서형태들을 기반으로 국어는 국가의 필요를 국민들 자신의 욕망으로 만드는 은폐된 명령어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국어를 통해 국민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한다는 것은 다른 언어를 통해 형성되는 다른 국민들과의 대등함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그들과의 경쟁을 의미하기도 한다. 형성과정에서 방언과 소수어들을 포식해온 국어의 흡수 및 확장의 본능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요컨대 그것은 국경 너머의 소수어, 민족어, 방언들을 타파하고 필요한 것을 흡수하면서 확장하려고 한다. 국어 체제에서 언어 간의 전쟁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국어는 국민의 공동망으로서 국가의 근간으로 기능하고 국가는 해외에서 생산된 잉여가치를 흡수함이 없이는 자신의 잉여가치를 실현할 수 없는 자본의 정치적 조직형태이기 때문이다.10) 자본이 본원적으로 제국주의적인 그 만큼 국가도 제국주의적이며 국어 역시 본원적으로 제국주의적인 언어형식이다. 이것은 식민지 정책에 언어동화 정책이 필수적인 구성부분으로 포함된다는 것에서, 아니 언어동화 정책이야말로 식민지 정책의 골간이라는 점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11) 식민지 언어동화 정책은 국내에서 방언들과 소수어들을 흡수하고 타파하면서 표준어, 공용어로서 국어를 정립한 역사를 다르게 반복한다. 국어의 정립과정이 사회 전체가 받아들일 수 있는 표준적 언어체계의 구축과 확립의 노력을 요구했던 것처럼 식민정책은 식민지 주민들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 국어의 확립 및 국제화 노력을 요구하는 것이다.12) 그 노력은 발음, 강세, 억양, 표기법, 문법, 어휘, 문체, 기계화의 용이성 등 언어의 모든 영역에 주의 깊게 기울여진다. 다시 말해 외국어의 다양한 언어적 변주능력을 국어의 동일성의 체계 속에 흡수하여 순치하면서 궁극적으로 외국어를 타파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 근대와 국어

이렇게 해서 민족국가를 중심으로 언어활동이 조직되는 '국어'(國語)의 시대가 개시된다. 국어의 지배는 전적으로 근대적 현상이다. 근대 이전의 지배적 언어생태는 이와 달랐다. 한문, 라틴 문자, 아랍 문자, 빨리(Pali) 문자 등 몇 개의 광중심적 문어가 지역적 공용어로 기능하고 각기 다른 소수어들과 방언들이 구어로 사용되는 구조를 갖고 있었다. 근대 이전의 출판은 이 광중심적 지역 문어들을 출판언어로 사용했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이 광중심적인 신성한 언어(신성한 묵어)에 의해 연결된 고전적 공동체를 근대 민족들의 상상된 공동체와 구분한다.13) 자본주의의 발흥과 발전이 자립적 민족국가의 수립을 필수적 조건으로 요구하면서 민족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언어 조직화가 곳곳에서 진행되었다. 앤더슨은 민족이라는 상상 세계를 구축하는 두 가지 연결매체로서 단순한 달력상의 일치로 나타나는 공허하고 동질적인 시간 외에 민족어로 출판된 책과 신문을 든다. 특히 신문에 대한 그의 서술은 인상적이다.


신문은 엄청나게 팔리지만 하루살이 같은 인기를 누리는 '극단적인 형태'의 책이었다. 1일 베스트셀러 책이라 말할 수 있을까? 신문이 인쇄된 바로 그 다음날에 폐품이 된다는--일찍부터 대량생산된 상품의 하나인 신문이 현대 내구재의 내재적 폐품화를 예고한다는 흥미로운--바로 이 사실은 픽션으로서의 신문을 거의 동시에 소비하는 ('상상하는') 이 엄청난 대중의례를 창조한다. 우리는 특정한 조간판과 석간판이 저 날이 아닌 이 날에만, 이 시간과 저 시간 사이에 압도적으로 소비될 것이라는 것을 안다. (…) 신문은 현대인에게 아침 기도의 대용역할을 한다고 헤겔이 관찰했듯이 대중의례의 의미는 역설적이다. 이 대중의례는 조용한 사적인 시간에 머리를 식히면서 행해진다. 그러나 각자는 그가 행하는 의례가 수천의(혹은 수백만의) 다른 사람들에 의해 동시에 반복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확실히 알지만 그 사람들의 신원은 전혀 모른다. 더욱이 이 의례는 하루 한나절의 간격으로 끊임없이 반복된다. 세속적이고 역사적으로 시간이 측정되는 상상의 공동체에 대해 이보다 더 생생한 다른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가?14)


인쇄자본주의를 근거로 반복된 민족에 대한 이러한 상상적 의례의 결과 주권의 성격과 위상이 바뀐다. 이제 정본 문자언어, 신성한 섭리에 의해 통치하는 군주, 우주와 역사의 통일이라는 시간관의 3위일체에 의해 지탱되던 전근대적 주권개념은 붕괴한다. 그것을 대체하면서 각각의 민족어를 말하고 읽는 집단이 주권의 궁극적 담지자로 부상한다.15) 민족 공동체에 대한 이러한 상상은 때로는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찬 혁명적 운동에 의해 조성되었고 때로는 이 대중적 공동체에서 배제될 위험에 처한 주변집단들(왕조와 귀족의 세력집단들)에 의해 위로부터 추진되었다. 황호덕은 박영효의  [사화기략]에 대한 분석을 통해 국어로서의 조선어의 확립과 조선민족의 상상적 발명이 후자의 경로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밝힌다.1) 19~20 세기 전후 개항, 정변, 내전, 전쟁, 합방을 거치면서 이루어진 세계체제로의 편입과정에서 조약과 통상의 필요성이 증대했고 그럴수록, 다른 민족어의 존재와 대비되는, 조선어의 부재가 깊이 실감된다. 차이가 차이로서 대접받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대칭성이 요구되는데, 국가 간의 대칭성을 요구하는 외교상황과 그 수행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구어 발화의 상황이 자국어의 필요성을 상상케 하고 국어 발명의 욕구를 자극하게 되는 것이다.2) 그리하여 1894년에 고종은 "법률칙령은 다 국문으로 본을 삼고 한문 번역을 붙이며 또는 국한문을 혼용함"이라는 칙령을 발하게 된다. 이로써 훈민정음 이후 중국말에 비교하여 방언, 이언, 속어, 언어(諺語)로 불린 말에 상응하여 '상스런 말을 적은 글'이라는 뜻의 '언문'으로 불려왔고 때로는 반절, 암클, 창살글자, 중글, 상말글 등으로도 불려던 정음이 마침내 국어, 국문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한다. 유길준이 <서유견문>(1895)을 국한문혼용으로 쓰고 이듬해 창간된 <독닙신문>이 순한글 신문으로 발간됨으로써 바로 세계체제로의 편입기에 비로소 민족어를 통한 민족 공동체에 대한 상상이 개시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세기 전환기에 국어, 국문을 정립하기 위한 주시경의 노력, 특히 1898년에 출판된 [국어문법]은 국어를 통한 자립적 사유체계를 확립함으로써 다른 민족과 대등한 민족공동체를 구축하기 위한 초석이 된다. 1910년 이후 일본의 지배와 동화정책 속에서 국어의 발전은 위기에 부딪히며 국어학 그 자체가 탄압의 대상이 된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은 그 정점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계속된 사전편찬 작업과 맞춤법통일 작업은 일본에 의한 언어적 동화에 대한 거부로서 정치가 언어에 내재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처럼 근대는 민족적 상상력을 활성화한 한 시대이다. 국어가 근대에 특징적인 현상이라 함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라. 민족문화와 민족어

이처럼 민족은 대타의식 속에서 민족어에 기반을 두고 상상된 특수한 역사적 형성물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민족이 민족문화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문화가 민족을 형성한다고 말할 수 있다. 민족문화의 형성 과정은 민족어의 세공에 기초한다. 이 사회적 과정에는 두 가지의 상반된 힘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다. 하나는 민족에 기초한 국가주권의 형성을 통해 자신을 확장하려는 개별자본의 욕망이다. 또 하나는 그 국가주권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방어하려는 민중들의 욕망이다. 자본은 민족적 통합이 축적과 경쟁의 지렛대로 기능하도록 만들기 위해 민중의 삶의 요구를 억제하려 하며 민중은 반대로 민족적 통합의 틀 속에서 자신들의 삶의 요구를 극대화하려 한다. 이 갈등 때문에 민족문화 속에 우파 민족문화와 좌파 민족문화의 대립이 발생한다. 물론 이 둘은 민족이라는 틀 속에서의 갈등이며 표준어의 확립은 이 갈등의 산물이다. 지배계급은 표준어의 제정과 규범화를 통해 민족어를 행정과 통치 및 교육의 필요에 종속시켜 왔다. 이 과정에서 민중의 소수적 언어들은 방언, 사투리, 지방어로 분류되며 하위언어로 배치된다. 이렇게 하여 민족문화는 소수어들을 흡수통합하면서 성장하는 표준어의 작동공간으로 경화된다.



3. 세계화와 영어공용 논쟁


가. 민족문화와 그것의 제국주의적 성격

민족문화, 민족국가의 형성과 발전이 자본주의적 사회통합의 종착지가 아님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소수민족을 병합하고 억압하면서 하나의 통일된 주권으로 일어선 민족국가, 소수어들과 방언들을 병합하고 배제하면서 표준화된 민족어, 그리고 민족어에 기초한 민족문화는 앞서 암시한 바처럼 모두 동일하게 본원적으로 제국주의적인 성격을 갖는다. 제국주의는 외부를 흡수하면서 민족국가의 국경을 확장하는 정치형태이다. 제국주의는 근대 초기에는 강대국에 전형적인 정치양식이었지만 오늘날 우리는 식민지 체험을 하고 독립한 나라들에서도 제국주의 논리가 작용하고 있음을 본다. 전후에 독립된 많은 민족국가들 중에서 한국처럼 국민적 통합에 성공한 일부 나라들이 아(亞)제국주의적 확장 욕망을 내보이는 것은 민족 개념 속에 외부의 흡수를 통한 확장이라는 제국주의 논리가 내재해 있다는 점을 반증해 준다.

그러나 오늘날의 민족국가와 제국주의는 흡수할 외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외부로의 확장을 꾀해야 하는 역설적 상황 속에 놓여 있다. 역사적으로 제국주의는 전자본주의, 비자본주의라는 자본주의 외부 지역의 자원들, 주민들을 민족국가적 자본주의 속으로 통합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프롤레타리아로 변형되고 기술세계가 제2의 자연으로 되며 기존의 자연도 자본주의에 의해 생산되고 재생산되는 영역으로 바뀐다. 그 결과 자본주의는 진정으로 고유한 자본주의로, 제 발로 선 자본주의로 되었다. 자본주의 외부에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흡수할 외부가 없는 상황에서 제국주의는 무엇을 흡수병합할 것인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이러한 상황에서 흡수병합의 논리가 작동하는 가장 최근의 형태이다. 세계화는 여러 민족국가들과 개별자본들과 국제기구들을 네트워크 형태로 통합하여 전 지구적 수준에서 주권을 재구축한다. 민족국가의 흡수병합의 논리는 오늘날 지구제국의 형태로 재생산되고 있다.3) 지구제국은 민족국가들을 마디로 삼으면서 세계 전체 주민들의 삶 에너지를 흡수한다. 이것이 정보적 자본형태인 초국적 금융자본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지구제국에 포획되어 있다. 제국 외부는 이제 사실상 실재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지구제국이 사용하는 주요한 지배수단은 핵, 화폐, 정보이다. 이 중에서 정보적 지배는 특히 사람들의 일상적 삶의 평면에서 작용하면서 사람들의 지각, 정서, 행동을 변조하는 내면적 권력형태이다. 정보적 지배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더욱 커지고 있다. 노동의 비물질화는 이러한 과정의 결과이자 동시에 원인이다. 노동은 정보, 지식, 소통, 정동을 중심으로 재편되어 가고 있는데 이것은 언어노동이 노동의 주요형태로 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 지구제국, 세계문화, 그리고 영어공용론

세계적 수준에서의 이러한 정치사회적 상황이 민족어, 민족문화, 민족국가의 위기를 조성한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한국에서 영어공용화론이 대두되는 정치적 지평이다. 영어는 제국의 정보적 지배를 위한 현 시기의 ‘사실적’ 공용어(oficiala lingvo)로, 제국 주권을 재생산하는 정신적 코드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영어를 확장시키고 사람들의 삶 속에 내면화시킴으로써 제국은 자기재생산의 지적 정서적 토대를 확보한다. 이런 의미에서 영어는 분명히 지배언어, 주권언어, 척도언어이다. 영어는 경영의 언어로서 효율적 축적의 수단이 됨과 동시에 노동언어4)로서 생존을 위한 필수 언어로 사용된다.5) 영어의 확장과 세계화의 효과는 수많은 언어들의 죽음으로 나타난다. 세계 언어의 절반 이상이 빈사 상태에 있다. 즉 다음 세대로 효율적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이대로라면 세계 언어의 대부분이 사멸하게 될 중대한 시점에 우리는 살고 있다.6) 세계문화는 소수어들, 소수문화는 말할 것도 없고 민족어들, 민족문화의 죽음을 빠르게 재촉하면서 영어에 기초한 세계 유일문화의 지배를 가져오고 있다. 이것이 영어공용론이 등장하는 사회정치적 무대이다.

복거일은 지금이 '모든 문명이 하나의 지구제국으로 통합되는 때'라는 예리한 시류감각에 자신의 논리를 정초한다. 사태에 대한 시민들의 판단을 흐리고 있는 것은 민족주의이다. 시민들의 애국심이라는 소중한 사회적 자산이 사회를 실제로 이롭게 하려면 거친 민족주의가 제어되고 길들여져야 한다. 민족주의는 민족어와 관련해서 가장 강렬하게 나오므로 민족어가 제어되어야 한다.7) 그의 논리를 계속 따라가 보자. 지구제국의 권력망은 사실상의 국제어인 영어를 기반으로 구축된 거대 언어망에 기초해 있다. 그것 역시 하나의 언어망인 민족어가 문제인 것은 새롭게 구축된 이 거대 언어망에의 참가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언어망의 경제적 효과는 그 참가자들의 수에 의해 결정된다. 민족어들에 비해 국제어의 망 경제적 효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그래서 마침내는 교역권 안의 모든 사람들이 국제어에 동화되게 된다. 국제어는 마침내 국제교섭에 쓰이는 수준을 넘어 세계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세계어로 변신한다. 영어에 대한 다양한 도전들이 있을 수 있다. 미국이 쇠퇴한다거나, 중국어나 스페인어가 부상한다거나, 개별 민족국가들의 저항이 거세진다거나, 비표준 영어들이 영어의 소통력을 침식한다거나 영어 학습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번역통역기가 발전한다거나…. 하지만 그것이 영어의 세계어적 지위를 무너뜨리지는 못할 것이다. 결국 이중언어 사용이라는 일시적 과도기를 거쳐 민족어들은 빠르게 쇠멸할 것이다. 번역과 통역이라는 불확실하며 비용이 많이 드는 수단에 의존하려 해서는 안 된다. 손해를 덜 보려면, 아니 사멸하지 않으려면, 요컨대 구원을 얻으려면 한시바삐 영어전용 열차에, 영어망 지구제국의 거대방주에 올라타야 한다.8)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으로 되는 것은 영어와 영어문화에서뿐이다. 그 이외의 경우에 가장 민족적인 것은 세계적인 것으로 되기는커녕 도태되고 쇠멸한다. 이것을 결정하는 것은 이미 영어에 의해 구축된 망(網)경제와 망권력, 그리고 언어망에 기초한 망문화이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세계적 망문화는 외부의 흡수와 병합에 의해 자신을 확장해온 민족어, 민족국가, 민족문화 논리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연장이자 최종적 귀착점이라는 사실이다. 세계주의와 민족주의는 모두 철두철미하게 권력의 논리이며 경제의 논리이다. 그것은 흡수동화의 논리이고 착취의 논리이며 분할지배의 논리이고 배제와 추방의 논리이다. 세계주의와 민족주의에서 사람들의 은 오직 대상으로만 취급된다. 복거일이 세계주의를 통해 민족주의를 제어하겠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의 세계주의는 민족주의에 내장된 권력과 제국주의의 논리를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구적 수준에서 완성하고 강화하는 것이다.


  다. 영어공용론에 대한 민족문화론의 대응

세계주의적 영어공용론이, 삼성-조선일보-복거일로 이어지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적극적 지지세력에 의해 주장되었음에 반해 이에 대한 반론들은 크게 민족주의로 묶을 수 있는 다양한 조류들에 의해 피력되었다. 이제 영어공용론 비판 흐름의 정신적 내면을 살펴보자.

우선 주목되는 것은 영어공용론 반대파에게서도 영어를 사실상의 공용어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는 것이다.9) 영어가 세계 공용어로 기능하는 것에 대한 반대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영어를 누구나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것, 그것도 효율적으로 배워야 한다는 의견을 양측은 공유했다. 영어 지배 상황에 적응하자는 것에 서로 동의하면서 논쟁은 영어공용론과 영어교육 개혁론 중에서 무엇이 더 영어능력을 향상시키는 방안으로 유효한가를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예컨대 한학성은 영어공용어 논쟁에서 벗어나려면 무엇보다 실질적인 영어교육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어를 한국어로 가르치지 말고 영어로 가르쳐야 하며 이를 위해 영어로 영어를 가르칠 수 있는 영어교사를 양성하는 것이 그 대안이라는 것이다. 채희락은 영어공용어화가 그것에 요구되는 높은 비용에 비해 영어능력 향상에는 그만큼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영어 능력 향상은 전적으로 영어를 배우는 개개인의 학습동기와 노력 여하에 달려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국제경쟁력 향상을 위해서 영어교육에 대한 투자를 늘릴 것, 영어 교사의 해외연수를 실시할 것, 영어권 지역의 해외동포 2세를 활용할 것, 자동번역기를 개발할 것 등의 방안을 제시한다.

영어공용론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언어학적 논점들이 제시된 것은 성과이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가 의사전달의 단순한 도구가 아니며 중립적이지도 않다는 비판이다. 윤지관은 영어가 중립적이라고 보는 영어공용론을 비판하면서 언어는 중립적 기호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부착된 의미이기도 하다는 볼로시노프의 관점에 의거한다. 언어의 본원적 사회성과 창조성을 괄호쳐두는 도구주의적 혹은 기능주의적 언어관이야말로 영어의 득세와 관련하여 가장 심각한 삶의 왜곡을 야기하는 관념이라는 것이다.10)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최근 영어교육이 실용영어 중심으로 기울어가는 것을 반성하고 교양영어 교육에 더 큰 노력을 쏟아야 한다고 주장한다.11) 실용영어는 창조성을 상실한 상공업적 기능어로서 죽은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어의 사회성과 정치성에 대한 이러한 확인을 통해 영어공용 비판론은 영어의 보편화 경향을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및 영어제국주의의 효과로서 파악하고 그에 대한 대응방안을 모색한다.12)

그러면 그 대응방안은 무엇으로 나타났는가? 일차적 대응은 영어공용이 아니라 영어교육 개혁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했다. 그렇지만 영어교육 개혁이, 세계화하고 있는 현 시기의 언어 문제에 대한 근본적 대안일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영어공용에 대한 반론에는 모국어를 통한 저항 혹은 모국어의 개혁과 세계화가 그 대안으로 덧붙여질 수밖에 없다.


한 민족 혹은 종족 구성원의 삶은 그들이 자기의 것으로 해온 언어, 곧 모국어의 환경 속에서 가장 충일해질 수 있다. 이방인의 언어, 특히 영어처럼 폭력과 힘을 동반한 언어가 언제나 주게 마련인 억압의 체험은 이 같은 자기실현의 가능성에 위기를 야기한다. 영어 앞에만 서면, 혹은 외국인 앞에만 서면 난처해지고 작아지고 마는 주눅 들린 심리 속에서 대등한 인간관계 혹은 의미 있는 교류는 한계를 가진다. 자기 언어 속에서 길러진 정체성에 대한 확신 가운데서 비로소 진정한 교류가 시작되며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의미 있는 경쟁력이기도 한 것이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표현을 빌리면, "어머니의 무릎에서 처음 접하고, 무덤에 가서야 헤어지는 그 언어", 즉 모국어의 의미는 여기에 있다.13)


모국어와의 고투를 통한 세계성의 실현을 주문하는 이러한 요구가 민족문화론의 핵심주제이자 최후근거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한 세기 이상을 이어져 온 이 오랜 문화적 노선 속에서 우리가 현 단계의 인류가 직면한 새로운 삶의 요구에 대한 해법을 찾을 수 있을까? 모국어가 새로운 삶을 열어내는 창조적 진화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민족문화론의 언어론 속에는 모국어, 민족어, 민족문화야 말로 수많은 소수적 언어들을 절멸시키면서 비대해진 언어라는 사실, 그리고 민족어 형성 메커니즘이 지금 영어를 승자로 부상시키고 있는 제국주의적 경쟁, 흡수, 탐식 논리의 기본 메커니즘이라는 사실에 대한 반성은 들어 있지 않다.

조동일은 영어가 국제사회의 공용어가 아니며 단지 교통어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면서 "인류 전체가 함께 사용하는 공용어는 있을 필요가 없다. (…) 세계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단일 공용어나 세계어는, 있다면 인류를 불행하게 하고 파멸로 이끌 수 있다. 수많은 언어가 공존하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전통계승과 문화창조를 계속해서 그 성과를 주고받아야 인류는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 교류를 위해서 번역을 활발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통어를 활용해야 한다"14)는 주목할 만한 생각과 대안을 내놓는다. '공용어가 아닌 교통어'라는 생각은 언어적 다양성을 살리면서 서로의 소통을 도모할 수 있는 언어 관계에 대한 발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역시 교통어를 "민족어와 민족어를 연결시키는 언어"로만 이해하면서 생태계의 다양성 못지않게 소중한 '문명의 다양성'을 '민족문화의 다양성'과 곧장 동일시한다. 요컨대 그는 "어떤 언어라도 소멸되지 않고 살아남아 민족문화를 이어받을 수 있는 새로운 세계를 염원한다"15)고 표현한다. 이러한 염원이 수많은 언어를 포식하면서 확장해 가고 있는 영어지배의 암적 실태를 외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그 역시 그가 염원하는 민족문화 체제야말로 수많은 소수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면서 결국에는 현재의 영어제국주의의 현실을 가져온 모반임에 대한 몰각을 드러낸다. 이렇기 때문에 모국어에 대한 단호한 확신을 표현하기보다, 영어에 대한 '비틀기'와 '되받아 쓰기'를 주장하는 아체베와 영어 없는 세상을 꿈꾸면서 기쿠유어로 소설을 쓰는 응구기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는 태도16)가 오히려 진지하게 느껴지는 것인지 모른다.

또 영어공용을 비판하면서 모국어와 민족문화를 옹호하는 견해는 엘리뜨의 지배를 허용한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왜냐하면 영어의 대중적 사용을 주장하는 영어공용론에서와는 달리 모국어중심론에는 대체로, 민족어는 대중이 사용하고 영어는 전문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주로 운용한다는 암묵적 표상이 뒤따름으로써 오늘날 사람들의 삶에 크고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국경을 넘는 삶에서 전문가의 지배가 확고해지는 것을 정당화해 주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영어공용론에 기초한 세계문화론과 민족어 사수론에 기초한 민족문화론의 투쟁을 검토해 보았다. 마치 화해 불가능할 것 같은 갈등 속에 휩싸여 있는 이 두 생각은 사실은 같은 부모(즉 자본의 제국주의적 주권 논리)에서 성장해 나온 형제들이다. 이 두 개의 언어론과 문화론은 언어가 권력이며 언어의 정치성은 경쟁력의 획득에 있다는 공유된 견해에 기초한다. 즉 이 둘은 권력언어관, 주권언어관을 공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언어에 대한 다른 사유가 가능할까? 그것은 현 시기의 언어 및 문화 문제에 대한 다른 생각을, 적극적 대안을 생산할 수 있을까?



4. 삶문화와 언어


  가. 다수어와 소수어

이쯤에서 우리는 다시 언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물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언어는 인간종의 진화의 산물이자 동시에 창조적 진화의 역능이고 기술이다. 진화는 경쟁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창조력에 의해 이루어져왔다. 우리의 삶의 각 순간들은 언제나 일종의 창조이며 우리 각자는 우리 삶의 장인(匠人)들이다.17) 언어적 삶은 우리의 삶의 비물질적 신체이다. 그런데 영어인가 국어인가 하는 논쟁은 언어의 문제를 경쟁력의 관점에서, 권력의 관점에서 다룬다는 점에서 하등의 차이를 갖지 않는다. 어떤 방안이 개인과 민족과 국가의 경쟁력을 더 강화시킬 것인가라는 평면 위에서 논의는 전개된다. 이것은 언어를 권력장치로 사용하는 지배계급의 관점에서 언어문제가 취급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입장에서 언어민주주주의의 문제가 실질적으로 사고될 가능성은 없다.

영어공용론은 노골적으로 지구제국에의 참가와 지구제국의 완성을 주장하며 영어망 경제에의 참가가 새로운 전 지구적 망주권의 이점을 누리는 첩경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대하는 입장을 망경제의 입장에서 서술하면 국어망 경제를 잃지 않으면서 영어망 경제에 마디로서 참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환원할 수 있다. 이 이종동질(異種同質)의 목소리들 때문에 영어망이나 국어망 모두가 사람들의 삶-공통체를 포획하고 흡혈하는 그물망이라는 사실은 깊이 파묻힌다. 여기서 창조적 진화를 위한 첫 번째의 언어적 노력이 다수어로부터 소수어를 구별하는 일이어야 할 필요가 발생한다.


프루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걸작들은 일종의 외국어로 씌어진다." 그것은 말더듬기와 같은 것이다. 단지 파롤만이 아니라 랑그가 말더듬기가 되는 것이다. 외국인이 되어라. 하지만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경우만이 아니라, 네 모국어 속에서 외국인이 되어라. 2개 국어나 다국어 병용자로 존재하라. 그렇더라도 하나의 동일한 언어 안에서 방언이나 사투리도 쓰지 말고. 사생아나 혼혈아로 존재하라. 하지만 혈통을 순화시키면서. 문체가 언어가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언어가 강렬하게 되는 것은, 값과 강렬함의 순수연속체가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언어 안에 비밀스런 하위-체계를 만들어내기는커녕 숨길 것 하나 없이도 모든 언어가 비밀스럽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우리는 절제와 창조적 뺄셈을 통해서만 이 결과에 이른다. 연속적 변주에는 금욕적 선들이 있을 뿐이며 약간의 풀과 맑은 물이 있을 뿐이다.18)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말하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국어 속에서 외국인이 되는 것이 필요하다. 당연히 영어 속에서도 외국인이 되는 것이 필요하다. 모든 언어에 대해 외국어인 언어, 더듬과 뒤섞이고 변주되는 언어는 소수어이다. 언어를 강렬하게 할 때 문체가 바로 언어가 된다. 모든 랑그는 필연적으로 개척되지 않은 가능성들을 남기며 추상적 기계는 이 가능성(혹은 잠재성)을 포괄한다. 잠재성은 실재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것의 실재성이다. 그것은 변수들의 연속적 변주로서 변수들의 상수적 관계의 현실적 결정에 대립할 뿐이다. 추상기계는 변화의 선 또는 창조의 선을 그려야 한다. 보편적이지 않은 특이한 랑그, 현실적인 것에 변주를 도입하는 잠재적 랑그를 만들기. 특이한 랑그에는 문법처럼 강제적이거나 불변적인 규칙이 없고 변주 그 자체와 더불어 끊임없이 변주되는 임시규칙만이 있을 뿐이다.19)

그러나 이 특이한 랑그, 말더듬는 랑그, 연속적 변주이자 창조로서의 언어는 그것의 집합적 배치물과 분리불가능하다. 집합적 배치물은 변수들을 다루며 변주의 선들에 따라 변수들의 다양한 관계들을 조직한다. 변수들을 상수적 관계로 맺거나 강제적 규칙에 복종시킨다. 따라서 랑그의 통일성은 정치적인 것이다. 들뢰즈가 "모국어는 없다. 단지 권력을 장악한 지배적 언어가 있을 뿐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집합적 배치물로서의 통일된 랑그는 추상적 기계들을 고정시키면서 추상적 기계들에 대립할 뿐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변주가 통과하는 잠재성을 결정하는 데 본질적이며 그 배치물 자체도 본질적으로는 그것에 내재하는 변수들, 창조의 선들에 의해 임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집합적 배치물은 추상적 기계와 독립해서 기능하지 않으며 추상적 기계 역시 집합적 배치물과 독립해서 존재하지는 않는다.20)

그러므로 다수어가 따로 있고 소수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다수어는 상수의 권력에 의해 정의되고 소수어는 변주 역량에 의해 정의된다. 방언도 변주 역량을 갖지 못하면 소수어로서 기능하지 못한다. 결국 두 종류의 언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언어를 다루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변수들에서 상수들을 뽑아내는 방식(다수어적 방식)이고 또 하나는 변수들을 연속적 변주 상태로 만드는 방식(소수어적 방식)이다. 상수는 변수들을 보편적이고 획일적인 방식으로서 다룸으로써 출현한다. 상수는 변수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변수의 임의규칙성을 강제규칙성으로 바꿈으로서 성립하는 것이다.21) 중요한 것은 다수어를 소수화하는 것, 소수어-되기이다. 그것은 변주의 연속체를 만드는 것, 언어에서 외침, 아우성, 음높이, 지속, 음색, 억양, 강렬함을 끌어내는 것, 어휘적-통사적 형식들을 감소시키고 변형과 바꿔 말하기를 증식시키는 것, 상수의 제한과 변수의 증식을 통해 역동적 차이들이 생성되게 하는 것, 방언이나 사투리로 재영토화되는 것이 아니라 다수어와 표준어를 탈영토화하는 것이다.22) 이  소수어-되기를 실천하기 위해서 각자는 우선 나만의 말, 자기 고유의 언어, 자신의 다수어를 발견해야 하고 그것을 정복해야 한다. 이 자기만의 다수어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연속적 변주의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소수적 말하기는 자기 자신의 다수어 속에서 이방인으로 말하기이다. 이것을 통해 소수적인 것은 모든 사람의 잠재적 역량을 갖게 되기이다. 그리하여 소수어 화자는 2개어 병용자 혹은 다국어 병용자로 될 수 있다. 그래서 소수어는 "다수어의 모든 차원들과 요소들이 소수화되게 하는 잠재력을 지닌 작인"23)으로 정의될 수 있다.  소수성은 게토라는 영토성을 갖고 있는 언어 상태이지만 그것이 가치 있는 생성의 씨앗으로 되는 것은 다수성의 탈영토화를 열어 놓을 때뿐이다. 그래서 "소수의식의 보편적 형상은 만인이 생성에 들어가는 것이며 창조란 바로 이 생성이다."24) 모국어중심론과 영어공용론은 모두 추상적 표준을 적용하면서 그 누구도 아니며 항상 아무도 아닌 자, 즉 등질적 국민이나 추상적 세계인을 만드는 데 열중한다. 그것은 생성과 창조에는 관심이 없으며 명령, 목적수행, 경쟁, 효율에만 관심이 있다. 그것들은 권력의 언어, 명령어, 죽은 언어를 지향한다. 반면 소수적 언어사용은 변주, 생성, 창조에 관심을 갖는다. 혁명적 자율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의식의 보편적 형상으로서의 소수파되기 자체이며 소수파되기는 방언이나 소수자 언어를 사용하는 것과 동의어가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소수적 요소들을 이용하고 연결접속시키고 결합함으로써 자율적이고 돌발적인 특이한 생성을 발명하는 것이다.25)


사람들은 명령어에서 명령어를 끌어낸다. 명령어 속에서 삶은 죽음의 대답에 응답해야 한다. 도주함으로써가 아니라 도주가 작용하고 창조하게 만듦으로써 명령어 아래에는 패스워드가 있다. 통과로서 존재하는 말들, 통과의 성분들이 있다. 반면 명령어는 정지들, 지층화되고 조직화된 구성물들을 나타낸다. 하나의 사물, 하나의 말이라도 분명 이중의 본성이 있다. 하나에서 다른 하나를 구출하라. 명령의 구성물을 통과의 성분으로 변형시키라.26)


들뢰즈는 명령어와 통과어를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명령어에서 통과어를 발명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 현실의 삶에서 영어도 국어도 명령어로 실존한다. 국어는 일국적 명령어이며 영어는 세계적 명령어이다. 모국어중심론이나 영어공용론 모두 삶을 자유롭게 하는 것보다는 삶을 권력의 선분에 종속시키는 것, 삶에서 도주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 표준적 질서를 확립하는 것, 다수어를 정립하는 것에 관심을 쏟는다. 이와 반대로 언어를 통한 자유는 다수어를 소수어로 만드는 것, 모든 소수적 요소들을 연결접속시키는 것, 이것을 통해 혁명적 자율의 과정이 작동되도록 만드는 것에 있다.


  나. 공용어와 공통어

그렇다면 이 혁명적 연결접속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이것은 소수어 되기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은가? 들뢰즈와 가타리의 언어론은 이 질문을 우리 몫으로 남겨두고 있다. 이것이 창조적 진화를 위해 우리 시대에 필요한 두 번째의 언어적 노력이 아닐까? 중요한 것은 공용어와 공통어를 구별 지을 뿐만 아니라 공용어에 공통어를 대립시키는 것, 나아가 공용어의 지배를 해체시키는 것이다. 너무나 자주 공통어는 공용어로 환원되고 공용어에 종속되어 왔다. 그래서 공통어는 공용어 외의 다른 방식으로는 생각될 수 없을 정도이다. 공용어는 다수어이며 지배의 언어이고 권력의 언어이며 명령의 언어이다. 그것은 표준을 요구하며 그 척도에 모든 사람이 종속될 것을 요구한다. 반대로 공통어는 명령의 언어가 아니라 사람들이 명령어 속에서 그것을 넘어서는 통과의 언어(paslingvo)이다. 그것은 어떤 표준도 요구하지 않으며 또 평균화된 모든 사람들이 사용해야 한다는 의무도 수반하지 않는다. 공통어는 등질적 사실들의 평균성과 공동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힘들의 통과-통행-흐름을, 혁명적 힘들 사이의 연결을, 혁명적 자율의 언어망을 의미한다. 그것은 특이성들의 소수파 되기를 망적 힘으로 연결함으로써 공통되기로 만들어 나가는 언어행위이다. 그것은 공용어 체제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었던 언어능력을 되찾으면서 창조적 진화의 길, 공통되기의 길, 영원하게 되기의 길을 찾아나가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이 공통되기의 방법들에 생각해 보는 것이 가능할까? 실제적 방식들, 경로들, 강도들은 구체적 상황 속에서 특이성들의 자기결정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므로 그 상황 외부에서 보편적 방법을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불필요하기도 하다. 다만 우리는, 영어 유일공용론을 상상케 할 정도로 균질적인 단일 공간으로 전환되고 있는 오늘날의 세계화하는 지구 상황 속에서, 공통되기의 가능한 경로들에 대해 상상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이 상상은 무엇보다 세계화가 자본의 일방적 행동만이 아니라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 세계화는 오늘날 분명히 자신의 생사를 건 자본의 전략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넘어서고자 하는 아래로부터의 욕망의 표현이기도 하다.27)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민족국가 속에 영토화되어 있던 민중들이 기존 체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소수화의 적극적 대안으로 탄생했다. 이 당시의 자본은 민족국가화 전략에 입각하고 있었다. 민족국가화 전략은 20세기 자본의 지배적 전략형태로서 제1세계의 케인즈주의적 사회국가에서 뿐만 아니라 동구의 사회주의 국가, 제3세계의 권위주의 국가 모두에서 뚜렷이 나타나는 전략형태이다. 20세기의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민족국가를 기반으로 한 민중의 연합인 국제주의가 자본주의 질서를 해체하기는커녕 때로는 그것을 위기로부터 구출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보여주었다.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을 일국적 지배계급으로, 즉 국민적 계급으로 조직하는 것만으로는 자유를 얻을 수 없고 자신의 국민성과 계급성을 동시에 넘어서면서 전 세계적 수준의 사회적 인류로 자신을 변형함으로써만 자유롭게 될 있다는 맑스의 이론적 주장이 역사적으로 확인된 것이다. 1968년 혁명 이후의 일련의 혁명적 사회운동들은 이러한 자각을 명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예컨대 1994년에 개시된 사빠띠스따 봉기, 1999년에 씨애틀에서 개시된 대항지구화 운동, 그리고 2001년에 첫발을 내디딘 세계사회포럼 등 주요한 운동과 투쟁들이 그러한 자각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이 운동들에서도 영어가 일종의 교통어로서 기능하는 것을 우리는 목격한다. 사빠띠스따 투쟁은 원주민의 소수어적 목소리를 스페인어로 옮기고, 다시 그것을 영어로 번역하여 인터넷 망에 유통시킨 사빠띠스따 지지 단체와 활동가들의 노력으로 인해 세계적 투쟁으로 부상되었다. 세계사회포럼도 처음에는 스페인어, 불어 등이 주요 언어로 사용되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영어가 주요한 언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운동도 지금 공통어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다. 영어의 득세를 침략과 수탈, 흡수와 병합을 의미하는 제국주의의 일방적 언어 표현으로만 간주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분명 영어의 득세는 미국이나 영국 등 영어사용권 주요 국가들의 권력확장적 언어정책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영어의 확장이 다른 한편에서 새로운 삶을 요구하는 다중들의 공통되기를 위한 공통어 요구에 의해 촉진되고 있다는 점 역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다. 다중들의 공통되기의 방안들

영어가 다중들의 공통어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인가? 다시 말해 영어로 충분할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다중들의 공통되기는 다수어를 정복하고 또 그것을 넘어서는 창조의 문제이다. 오늘날 운동에서 영어를 이런 수준에서 정복하고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의 전문가들에 불과하다. 그래서 대항지구화 운동에서 결정적인 의사결정이 이들 소수 전문가들의 수중에 맡겨질 가능성이 높고 또 그것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영어 지배의 환경으로 인해 전문가가 아닌 많은 사람들도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소통중심적 실용영어는 점점 더 기업적 관심에 오염되어 있고 형식적이고 죽은 언어로 되어 가고 있다.28) 다시 말해 실용영어로는 기존 질서의 코드를 반복할 뿐 혁명적 창조의 선을 열어나갈 수 없다.

영어공용론은 정치적 계급적 지향성은 다르지만 영어사용 능력에서 대중과 전문가 사이의 이러한 괴리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다. 영어공용을 통해 누구나가 차별 없이 실용영어 이상의 영어를 구사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영어공용론은 정치적으로 전 세계적 양극화와 위계화의 주요 행위자인 신자유주의를 적극 지지하면서도, 언어관에서는 이렇게 마치 대중민주주의의 이념을 가진 것처럼 나타난다. 여기서 영어망에의 참여는 오직 경제적 이익을 위한 것으로서, 이러한 경우에는 실용영어 이상의 영어라 할지라도 인간의 창조적 삶이 아니라 그것의 죽음과 결합된다는 점을 먼저 지적하자. 그리고 이미 모국어를 갖고 있는 민족들의 경우는, 수 세대에 걸친 식민경험 없이 영어(혹은 다른 민족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는 것(혹은 정복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모국어 자체가 누대(屢代)에 걸친 내부 식민화를 통해서 정착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영어공용화가 만약 실시된다면 그것은 사람들을 장기간의 식민상태에 묶어두기 위한 억압적 정치를 수반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영어교육 개혁을 통한 영어습득이라는 대안은 어떨까? 민족어중심론자들은 영어교육의 개혁을 통해 오늘날 영어를 둘러싼 언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이 대안이 소수 엘리뜨의 국제관계 독점을 가져오리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말했다. 여기서는 외국인이 영어를 정복하기 어렵게 만드는 언어 내적 요인들에 대해서 주목해 보자. 영어는 문법이 상대적으로 쉬움에도 불구하고 음소적 철자법이 아닌 역사적 철자법을 고수함으로 해서 실제 발음과 철자법 상의 괴리가 심하다.29) 이것은 동일하게 라틴문자에 기반하면서도 음소적 철자법을 선택한 핀란드어, 이탈리아어 등과 현저하게 다른 영어의 특성이다. 영어가 자신의 모국어가 아닌 사람은 발음을 듣고서는 그 철자를 유추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거꾸로 철자를 통해 그 발음을 정확하게 유추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과 영어를 외국어로서 사용하는 사람 사이의 간격은 영어교육이 개선된다 할지라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어에 기초를 두고 있는 세계화는 본질적으로 위계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영어를 변용시켜 사용하는 방안은 어떠한가? 미국의 흑인이나 인도, 필리핀, 아프리카 등지의 사람들이 오랜 식민체험 후에 영어를 변용시키고 변주시켜 특이한 영어를 창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모든 언어 속에는 탈영토화의 성분, 변주의 성분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영어를 정복하지 못한 사람들이 주요한 언어수행의 방법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Basic English, Business English 같이 기성품으로 변용된 간단 영어들을 사용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죽은 언어이지 살아 있는 언어는 아니다.

직접소통과 직접연합의 사방이 막힌 궁지 앞에서 공통되기의 문제를 번역자, 통역자, 번역통역기에 의한 번역실천들을 중심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확실히 번역은 외국어 발화자에의 단순한 제국주의적 흡수 혹은 동화를 저지하면서 특이성이 살아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번역은 말하기․쓰기․듣기․읽기의 행위체들 사이에 상정된 인격(인칭)적 관계 속에 '이접적 불안정성'30)을 도입하면서 공통을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이미 사회화되어 있는 것들 속에 있으면서도 그것에 변주를 도입하는 특이자인 번역자는 다양한 변주들의 창조적 선들을 서로 연결시킴으로써 공통의 힘을 구축한다. 이 점에서 번역은 사카이 나오키가 외국인들의 비집성적(nonaggregate) 공동체라고 부르는 새로운 유형의 공동체에 대한 표상을 제공한다. 그것은 그곳에 "우리는 함께 있으면서 스스로를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서로 떨어져 있고 우리가 함께 있는 것이 어떤 공통된 균질성에도 기초하지 않"31)는 그러한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에서는 균질언어적 말걸기가 아니라 이언어적 말걸기가 중요하다.


균질언어적 말걸기의 자세는 균질적 매체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적이고 투명한 전달을 정상으로 보며 여기에는 이질적인 매체가 개입되지 않는 한 번역이라는 이념은 의미가 없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언어적 말걸기의 자세는 상호적이고 투명한 전달이라는 기준에 머무르지 않고 그 대신에 언어적인 것이든 아니든 간에 모든 매체에는 이질성이 내재하기 때문에 모든 발화가 전달에 실패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모든 번역은 그에 응답하는 번역을 부르며, 이런 유의 말걸기에서 분명한 것은 전달의 틀 내에서 번역은 끝이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언어적 말걸기의 자세에서 듣는이는 쓰인 것이든 말해진 것이든 간에 발언을 실제로 받기 위해서는 모든 발언을 번역해야 한다. 또한 이언어적 말걸기의 자세에서는 발화행위를 통한 말걸기가 최종적인 전달과 일치한다고 생각되지는 않기 때문에 말하는 이가 제공하는 것을 받기 위해서 듣는이는 행동하는 것을 요구받는다. 즉 듣는이를 향하는 것이 자동적으로 배달되지는 않는다는 것인데, 그것은 말걸기와 전달하기 사이의 격차, 말하는이와 듣는이 사이에 있을 뿐만 아니라 말하는이나 듣는이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가지는 본질적 거리를 나타내는 격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언어적 말걸기의 자세에서 받는 행위는 번역이라는 행위로 생겨나고 번역은 모든 듣기나 읽기에서 일어난다.32)


사카이는 외국인들의 비집성적 공동체라는 개념을 통해 언어행위에 내재한 특이점을 극히 면밀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그는, 개개의 특이점들이 번역이라는 행위를 통해 공통을 구성하는 실천적 과정을 실감나게 서술한다. 그를 통해 우리는, 번역이라는 행위가 단순한 기술적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언어행위와 삶행위에 내재하는 본원적 활동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실제적 번역 행위를 공통되기의 유일한 혹은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간주해도 좋을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번역의 본원적인 삶내재성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오늘날 긴급해진 것, 즉 직접적으로 연합한 사회적 인류를 구축할 필요성과 그 욕망을 번역이라는 방법으로 충족시키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협의의 실제적 번역이 번역가라는 사회적 집단(심지어는 번역기라는 기계장치)에 너무 많은 것을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와 더불어 현실에서 번역은 강한 언어에서 약한 언어로의 일방적 번역흐름이라는 언어권력의 상황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오늘날의 번역이 다양한 여러 언어들의 공통되기를 가져오기보다 소수 언어권력의 명령을 집행하는 과정으로 되고 있는 사정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라. 보편어의 꿈에서 공통어 운동으로

그렇기 때문에 혁명적 소수성들의 보편적 연결접속, 특이성들의 비집성적 공동체를 추구하는 대항지구화 운동의 언어적 상상력은 다시 16세기 이래 많은 사람들이 이상주의적으로 추구해 왔던 인류 보편의 언어적 소통에 대한 꿈, 즉 보편어 구상을 검토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보편어에 대한 꿈은 고대 이집트 왕 프샤메틱이나 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자 쩨파냐(Cefanja)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만큼 오래되었다. 중세 빙겐의 힐데가르트 수녀가 창안한 '무지한 자의 언어'(Lingua Ignota)도 보편어를 찾는 역사의의 한 장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17세기에는 R. 데까르뜨, G. W. 라이프니츠, J. A. 코멘스키(코메니우스) 등의 철학자들이 전 인류적 소통을 위한 언어에 관해 숙고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주로 세계를 논리적으로 서술하는 언어, 즉 논리어에 대한 추구였다. 특정한 소수어에 기초한 후험적 기획은 카르포포로필루스(Carpophorophilus)라는 필명을 쓴 저자에 의해 1732년에 출판되었다.33)

우리는 보편어를 사회의 이상적이고 사회주의인 변화와 연결시키려한 적극적 시도들의 역사에 주목할 수 있다. 에스페란토에 대한 박해의 역사를 상세하게 연구한 울리히 린스는 근대 이전 수 세기에 걸친 보편어 추구의 역사를 흥미 있게 요약한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 부분적으로 중복되고 또 다소 길지만 긴 역사가 매우 압축적으로 정리되어 있으므로 그의 요약 그대로 인용해 보자.


민족적 경계를 넘어서는 인류의 언어적 상호이해라는 주제는 일찍이, 우리가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의 개척자들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사상가들의 정신을 점령했다. 영국 휴머니스트 토마스 모어, 이탈리아의 군주 똠마소 깜빠넬라, 그리고 가상의 나라로의 여행기를 쓴 프랑스 작가 데니 베라 다레 등이 그런 사람들에 속한다.  [유토피아],  [치비타스 솔리스], 그리고  [세바람브의 역사]와 같은 그들의 작품들 중에는, 환상에 가득 찬 신세계 기획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종종, 새로운 사회질서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을 돕거나 가로막는 요소로서의 언어에 관한 암시들이 발견된다. 심지어, 그 작품들 중에서 몇 가지는 또, 볼테르가 “삶의 가장 커다란 불행들 중의 하나”로 애통해 한 것, 즉 인류의 언어적 분열을 없앨 제안들을 했다. 볼테르의 불만은, 협소한 민족적 사고방식에 반대하면서 이성, 도덕, 법질서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조화에 호소하는, 17 세기와 18 세기의 계몽주의에 특징적인 것이었다. 민족어들이 다양하게 꽃피고 세계 지식인들의 상호연결수단으로서 라틴어의 의미가 약화되었던 17 세기 초 이래로, 많은 철학자들과 과학자들--그들 중에 데카르트, 코메니우스, 라이프니츠 등이 포함된다--은 완전히 새로운 언어를 창조할 가능성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들의 목적은 서로 다른 언어 사이의 훨씬 손쉬운 소통 수단을 획득하는 것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단어들과 개념들을 결합하여 인간의 사유를 충분히 반영하고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의 모든 언어들을 넘어서는 언어에 도달하는 것에 있었다. “철학적” 언어를 위한 다양한 설계들이 보편어의 계획에 바쳐졌다. 보편어는 인간 지성의 부단한 전진의 논리적 정점으로 받아들여졌다. 또 그것은 심지어, 좀더 신비하게 생각하는 사상가들의 상상처럼, 바벨에서 언어의 혼란이 생기기까지 실존했던 상태로의 복귀를 약속했다. 민족적 부활과 낭만의 시대였던 19세기 동안에  더 많은 보편어 기획이 나타났다. 그것들은, 철학언어나 선험언어들과는 달리, 실존하는 언어의 구조나 어휘들에서 더 많은 것을 뽑아내려 했다. 그것들이, 훨씬 실용적인 해법을 목표로 삼는, 새로운 언어 계획의 경향에 대한 더 적극적인 지지의 형식을 취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들에서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의 대표자들이 가졌던 관심은 지속되었다.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들은, 자신의 작품들 속에서, 새로운 사회질서라는 조건 하에서 인류의 언어적 통일성이라는 관점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들은 보편어의 특징이나 그것의 형성과정을 상세히 밝히지는 않았다. 프랑스인 에띠엔느 꺄베가 쓴 소설 [이까리로의 여행]은 공산주의적 식민지의 실험을 고무했는데, 거기서 그는 이까리 사람들이 배우기 쉬운 충분히 규칙적이고 이성적인 언어를, 언어들의 진보를 방해하는 변이와 불완전함을 물리치는, 언어의 모델로 제시했다. 또 특이한 프랑스인 샤를 푸리에(Charles Fourier)의 웅대한 책 [보편적 통일의 이론]에도, 완전한 사회에 적합한, 이성적 보편어라는 논제가 나타난다. 그 언어의 발생은 민중들 사이의 접촉의 결과라고, 즉 실존하는 “비이성적” 언어들의 융합의 결과라고 --다소 모순적으로-- 예측되고 있다. 맑스 이전 사회주의의 주요 대표자인 또 다른 프랑스인 피에르-조제프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은, 심지어 언어에 관한 저작(1837년에 출간한 [일반문법 시론]을 가리킨다.-옮긴이)으로 데뷔를 했다. 그는, 인류가 과거 언젠가 공통어를 가진 적이 있으며 잃어버린 언어적 통일성의 재건을 통해 전 세계적 우애를 회복할 것이라고 믿었다. 더 주목할 만한 것은, 가장 독창적인 초기사회주의자들 중의 한 사람이며, 독일의 재단사이자 독학자인 빌헬름 바이틀링(Wihelm Weitling)이 보편어라는 주제에 관해 논한 것이다. (…) “애국주의와 민족성이라는 어리석은 선입관을 분쇄할 것”을 권하는 바이틀링은, 라이프니츠를 가리키면서, “완전히 새롭고 아름답고 듣기 좋은 완전한 언어를 발명하는 것”은 필요하고 또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기차와 비행기의 시대에 언어들의 경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가 보기에는, 상상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바이틀링 자신이 그 문제를 풀어내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은 세계어의 실제적 사용에 관한 저 역사적 이해와 대조적이다. 단지 발췌를 통해서만 알려져 있는 그의 작품 [보편 사유론과 언어론](Allgemeine Denk- und Sprachlehre)은, 위대한 철학자들의 모델에 따라, 사유와 언어의 일치를 이룰 완벽한 체계를 발견하고 그렇게 해서 우주 전체의 분류를 제시하려는 야심적 시도이다. 보편어에 관해 소묘된 생각들이 아무리 피상적이고 또 종종 소박하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은 어떻든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의 지도적 대표자들의 생각의 구성적 부분이었다. 이성에 복종하면서 그리고 모든 미신을 버리면서, 사회적 불평등과 민족적 차이를 사라지게 하는, 연대하는 인류에 관한 꿈은, 언어적 상호소통의 영역에서도 원시적 낙원상태를 부활시킬 수 있으리라는 상상을 쉽게 발생시켰다.1)


이상의 모든 기획들은 기획에 머물렀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꿈을 이어받으면서도 단지 꿈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직접 말하며 소통한 사람들을 발견한 것은 1879/80년에 만들어진 볼라퓌크였다. 그러나 볼라퓌크는 난해함과 소통상의 장애라는 언어내적 원인과 1887년에 자멘호프에 의해 만들어져 빠르게 보급되기 시작한 에스페란토의 영향으로 일찍 소멸했다. 에스페란토는 초기에 에스페란토의 동맹자로 여겨졌던 사회주의 국가들(그리고 파시즘)의 뜻하지 않은 탄압으로 인해,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프랑스어나 영어와 같은 주권적 공용어의 득세로 인해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만 사용되어 왔고 많은 사람들은 그것의 실효성에 대해 의심하거나 혹은 그 실효성이 끝나 실패한 것으로 단정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복거일은 이렇게 말한다.


1887년에 폴란드 언어학자 라자루스 루트비히 자멘호프가 발표한 에스페란토어는 대표적 예다. 아쉽게도 그런 인공어들은 널리 쓰이지 못했다. 그것들을 아는 사람들은 적었고 그것들로 저장된 문화적 유산은 전혀 없었다. 그것들을 배워서 얻을 이익이 거의 없었으므로, 그것들을 배우려는 사람들은 늘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국제어로서의 장점들을 여럿 갖추었지만 망경제의 이점을 누릴 길이 없었으므로 인공어들은 결국 외면당했다.2)


조동일도 이와 유사하게 "에스페란토라고 하는 인공어를 만들어 인류 전체가 함께 사용하자는 운동이 있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3)며 에스페란토의 실패를 단정한다. 또 정시호 역시 인공언어 에스페란토를 링구아 프랑카(교통어)로 하자는 주장은 "이상과는 달리 현실성이 없다"4)고 재단한다. 이 외에도 에스페란토를 죽은 개로 취급하는 생각과 말들은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에스페란토가 인공어에 큰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이 생각한 만큼 널리 쓰이지 않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에스페란토는 인공어에 큰 기대를 걸고 있지 않았던 사람들의 예상보다는 훨씬 널리 보급되어 있다. 어떤 언어를 배워서 경제적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에스페란토를 배우려 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인류의 공통되기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바로 얻을 경제적 이익이 거의 없다는 바로 그 이유가 서로의 공통되기, 친구되기를 도와주기 때문에 에스페란토를 배운다. 에스페란토는 어떤 국가의 공용어도 아니며 일방향적인 텔레비전이나 일간신문을 전혀 갖고 있지도 않으며 자격증을 부여하는 경우도 별로 없다. 그 언어의 운명이 오직 사용자들 개개인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의지와 실제적 사용에만 달려 있다. 그것은 복거일이 말하듯이 망경제에서 배제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가 권력의 관점에서 벗어나 삶의 관점에서 다시 생각하면 권력의 눈이 단점이라고 말하는 이 각각의 것들이 사실상 커다란 삶정치적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은 아닌가? 망경제에서 배제되어 있는 것은 에스페란토만이 아니다. 세계의 프롤레타리아들, 다중들은 망경제에 참가하면 할수록 가난해지고 무력해지며 그것이 '누린다'는 이득의 메커니즘에서 지속적으로 추방당하고 배제당한다. 복거일이 말하는 바의 망경제가 크면 클수록 그것에 참가하는 자본이나 권력은 더 큰 이익을 보겠지만 다중들은 더 가혹한 착취, 더 잔혹한 억압, 더 참혹한 가난 외에는 얻을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중들에게 망경제에의 참여를 대안으로 권유하는 것은 고통과 죽음을 권유하는 것과 다른 것이 아니다. 다중들은 오직 자기 자신의 자율적 삶의 망을 구성하는 것에 의해서, 그리하여 현실의 경제망--그것은 다중들의 잠재적 공통체에 대한 착취에 의존한다--을 해체시키는 것에 의해서 자유롭게 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다중의 운명은 에스페란토의 운명과 매우 흡사하다.

영어가 사람들을 거대 제국의 신민으로서의 추상적이고 동질적인 세계인으로 만들고자 함에 반해 에스페란토는 특이한 개개인의 발전이 인류의 발전을 가져오며 다시 인류의 발전이 개개인의 발전의 계기로 되는 선순환적 관계 속의 인간, 즉 인류인을 창출하는 것을 지향하는 언어이다. 인류적 공통되기의 이념은 에스페란토에 내재한다. 다중의 공통되기 운동이 에스페란토를 공통어로서 사용할 필요성이 있다면, 맑스의 사회적 인류의 이념과 자멘호프의 인류인주의가 서로 다른 방향에서 비스듬히 겹쳐지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5) 여기서 에스페란토를 공통어로 삼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조금 더 서술할 필요가 있겠다. 에스페란토를 공통어로 만든다는 것은 그것을 세계 공용어로 만든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람들이 에스페란토를 표준으로 받아들일 의무를 갖게 한다거나 법률과 규정에 따라 개개인에게 자격을 부여하는 척도로 사용한다거나 영어를 포함하여 수많은 개별 국어들, 민족어들, 방언들, 소수어들을 사용하지 못하게 금지한다거나 하는 것은 이와 전혀 무관한 일이다. 에스페란토를 유일언어로 만드는 것은 더욱 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오히려 에스페란토 공통어 운동이 반대해야 할 일이다. 에스페란토 공통어 운동은 개개인의 특이한 언어능력들의 최대한의 해방을 돕고 촉진하는 것으로 기능해야 한다.6) 개개인들의 언어적 창조능력이 극대화되어서 다수어를 정복하고 그것을 뒤섞고 자유롭게 변주하면서도 그것이 블랙홀에 빠지지 않고 인류인되기, 공통되기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국어나 민족어 혹은 세계어의 경우, 그것들의 일괴암적 폭력성이 드러나고 다중의 투쟁에 의해 그것들이 다양한 소수어들로 해체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7) 그러나 그것은 결코 언어의 죽음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며8) 국어, 민족어, 세계어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있는 언어들의 소수적 해방, 소생을 의미할 것이다. 소수어와 공통어 병용 및 혼용을 통해 개개인들은 고립된 개인으로 남아 있지도 않을 것이며 국민으로 집단화되어 있지도 않을 것이며 세계인이라는 추상적 규정 속에서 무력함을 느끼지도 않을 것이다. 개개인들은 인류인들의 자유로운 망 속에서 부단히 새로운 삶을 여는 가치 창조적 마디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먼 미래에나 가능한 이상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공통어는 공용어와는 달리 총체성을 자임하거나 욕망하지 않는다. 그것은 양적 집합으로서의 인류를 대표하려는 허구적일 뿐만 아니라 죽은 욕망을 갖지 않는다. 공통어는 특이한 힘들의 실재적인 접속, 이접, 통접을, 요컨대 창조적 망 구성을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에스페란토 공통어 운동은 미래에 도달할 어떤 상태가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누구나가 즉각적으로 실행 가능한 실재하는 운동이다. 이것은 특이어-공통어의 2언어 병용 및 혼용을 기축으로 한다. 하지만 이것이 언어종으로 구분되는 두 언어의 병용/혼용에 고정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특이어의 직접사용이나 특이어들 사이의 번역과도 대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2언어 병용은 이런 것들의 광범위한 이용과 보충을 통해 훨씬 더 풍부해질 것이다. 나아가 에스페란토 공통어 운동은 에스페란토를 완성된 언어로 간주하는 것과도 거리가 멀어야 한다. 공통되기에서 모든 규칙이 임시규칙에 불과하듯이 에스페란토 역시도 임시어로서 기능해야 하며 끊임없이 언어개혁과 언어혁명에 열려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공통되기에 더 효과적인 새로운 공통어로의 대체 가능성에까지 완전히 열려 있어야 할 것이다.


1. 맺음말


지금까지 우리는 민족문화에서 세계문화로 이행하고 있는 현대 지배문화의 변화경향과 그것에 대항하는 언어적 잠재력에 대해 살펴보았다. 영어의 득세와 이에 영합하는 영어공용론의 확대는, 지금까지 지배적이었던 민족문화의 지배를 흡수, 잠식, 재구성, 대체하면서 세계문화가 구축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세계문화의 구축과정은 민족문화가 구축되었던 이 흡수, 재구성, 대체의 과정을 전 지구적 규모에서 반복한다. 그래서 민족적인 것의 철저화가 곧 세계적인 것으로 되는 상황은 영어사용권 국가, 특히 미국의 예외적 현상으로 되고 있을 뿐이다.

각기의 민족어들이 민족문화를 구축하는 표준어였듯이 영어가 세계문화를 구축하는 표준어로서 기능하기 시작했다는 것, 바로 이것이 영어공용 논쟁이라는 장기 논쟁을 불러오고 있는 조건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논쟁은 주권문화와 주권언어를 둘러싼 논쟁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러나 주권이 생명, 삶을 명령하고 통제하는 것인 하에서 주권언어에 대한 논의는 삶의 내재적 진화의 문제를 다루지 못한다. 삶의 내재적 진화를 규정하는 문화는 민족문화도 아니요 세계문화도 아닌 삶문화이다.9) 이것은 언어의 문제에서도 동일하게 말할 수 있다. 삶의 창조적 진화를 규정하는 언어는 민족어도 세계어도 아닌 개개인들의 특이한 언어능력, 특이한 랑그로서의 삶언어이다. 삶문화는 민족문화나 세계문화와 구분되는 현실적 문화영역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은 주권문화 속에서 그것에 대항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경향으로서 실재한다. 주권문화의 이행이 실제로는 삶문화의 내재적 운동에 대한 반작용이다. 삶언어는 우선 모든 사람들의 창조적 언어표현능력으로서의 특이어이다. 그것은 주권어나 공용어 등이 수행하는 표준화, 상수화, 흡수, 배제, 대체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정복하며 비틀고 뒤섞으면서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는 능력으로 나타난다. 삶언어는 공용어와는 달리 고정된 규칙체계에 묶이지 않으며 끊임없는 변주능력을 통해 나타난다. 그것이 규칙을 갖고 있다면 새로운 변주 속에서 변형될 임시규칙으로서뿐이다. 그러나 특이어는 게토에 묶이고 블랙홀에 빠질 위험을 언제나 갖는다. 이 위험을 제어하면서 특이어들이 그것의 변주운동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특이한 언어적 힘들의 연결접속이 필요하다. 이것이 언어적 공통되기의 문제이다. 공통되기는 언어적 소수파되기를 그 계기로 삼는다. 소수파되기 없이 공통되기는 존재할 수 없다. 공용어는 사실상 이 언어적 공통되기의 전복이며 물구나무선 공통되기이다. 그것은 소수파되기를 억제하는 공통되기이다. 공통어가 공용어에 대립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공통되기는 언어문제에서 다중어사용, 이중어사용, 번역 등의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져왔다. 그런데 오늘날 사회적 인류의 구성이 당면한 의제로 제기되어 있는 상황이 지금까지의 공통되기 방식의 한계를 드러냈다. 다양한 개개인들의 언경(言境)을 넘는 직접적 연합, 직접적 공통되기가 필요해진 것이다. 영어의 세계어화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주권의 응답방식이다. 그러나 영어는 다중들의 공통되기를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억제한다. 그것은 추상적이고 동질적인 세계인을 제국의 신민으로 만드는 표준적 세계어로 기능한다. 각각의 민족어가 추상적이고 동질적인 국민을 만들어온 과정이 더 큰 규모에서 반복되는 것이다. 우리가 국가나 자본에서 독립된 언어 에스페란토를 공통어로 사용하는 문제에 진지한 관심을 쏟아야할 이유는 여기에 있다. 에스페란토는 보편어에 대한 오랜 꿈의 연속이면서 인간의 탁월한 언어적 발명능력의 산물이다. 에스페란토는 소수파되기를 억제하지 않는 공통어로 기능할 잠재력을 갖고 있다.10) 그것은 국민이나 세계인이 아니라 인류인(homarano)에 의거하고 또 그것을 생산할 것이다. 인류인은 지구상 모든 사람들의 추상적 집합이 아니다. 그것은 공통되고 있는 소수적 힘들을 일컫는 이름, 즉 부단한 생성의 이름이다. 따라서 에스페란토 역시 생성의 언어인 한에서만, 그리고 다양한 언어적 힘들의 변주에 개방되어 있는 한에서만11) 이 공통되기의 언어적 교향악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태그 :
트랙백 | 댓글(1)
이 글의 관련글(트랙백) 주소 :: http://www.esperamondo.com/es/trackback/69
directory submission 2011/11/18 21:03 L R X
감사합니다

아이디 :
비밀번호 :
홈페이지 :
  비밀글로 등록
내용 :
 



[PREV] [1] ..[75][76][77][78][79][80][81][82][83].. [121] [NEXT]
관리자  |   글쓰기
BLOG main image
- 작지만 소소하게 느끼며 채워가는 문화 게릴라로서 글 작업을 해 나 가려 합니다
전체 (121)
문화관련글발 (21)
대중문화 (2)
책 리뷰 (3)
문화관련 글들(ktp) (15)
문화관련 정보 (10)
여행 (56)
Esperanto 관련 (13)
리마 라파쓰 세방화 콜로비아 국경넘기 고디네스 불후명작 살인혐의 유고슬라비아 아르헨티나 페소 담장그리기 씨비타베키아항 시몬 볼리바르 피라미드 르느와르 시인 고은 살사 스페인 원주민의 저력 제1차세계대전 제국 육자배기 상생 이브몽땅 비만 민중미술 웹2.0 시애틀 공선옥 로마인이야기 학교괴담
"희망노래" 미치자!!
에스페란토 강습회 소식
잡초를 파는 사람들
멕시코 치아파스 지역 (1)
과테말라 아티틀란 호수
감사합니다
2011 - directory submission
안녕하세요 희망세상에 김민경..
2011 - tnr8386(김민경)
고선생님 멋진여행에 좋은 ..
2011 - tnr8386
장기 투자에 유용한 상품 중 ..
2011 - sdf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2011 -
문화운동의 살핌과 고찰 그리..
희망세상
2006년 11월 22일 - 핫 이슈 :..
skinblog의 블로그
Total : 124188
Today : 83
Yesterday : 82
태터툴즈 배너
rss
 
 
 
위치로그 : 태그 : 방명록 : 관리자
희망세상’s Blog is powered by Tattertools.com / Designed by plyfly.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