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루톤!(안녕하세요의 에스페란토)
처음 만나는 우리에게 친근한 에스페란토가 건네진다.
호주 호바트의 에스페란티스토 로베르토가 천진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든다.
약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는 빛 바랜 츄리닝에 캡을 쓰고
우리 앞에 나타났다. ~
거리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헬로 대신 살루톤을 건네는
그는 에스페란토 전도사 같았다.
잠시 마주친 사람들이 모두 에스페란티스토란다.
단 한마디 ‘살루톤’만 구사해도 이미 에스페란티스토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발 하나를 들여놓았다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 같았다.
끊임없는 에스페란토 보급을 위해 멈추지 않는 그의 노력이
그저 가상할 뿐이다. 슈퍼에서 만난
아프리카 보츠와나의 한 여인도, 중국 레스토랑에서 만난
백인 소녀도 모두가 미래의 에스페란티스토라고 말하는
로베르토야말로 진정한 에스페란토의 선교사였다.
언젠가 호바트의 거리마다 초록의 물결 칠 그날을 기대해 본다.
6월 2일(수요일) 오후 6시 30분 태즈매니아 대학에서
에스페란토 모임을 갖는다고 한다.
안드레오, 스테파니, 올리베로
이렇게 3명의 이 대학 청년들이 모였다.
영어권 국가라는 특권을 마구 마구 누리고 있는 이들이
에스페란토에 자의반 타의반 몸을 담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드넓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 위 사진은 공부모임, 아래 사진은 뒷풀이 시간-역시!! 술이 있어야 사람도 모인다>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의 해리를 연상케 하는
가냘프고도 총명한 인상의 올리베로가
에스페란토를 더듬거리며 말하는 모습에서
에스페란토의 평등성을 엿보게 된다.
전 세계 어느나라 사람이든 평등하게 배우고 익혀서
세상의 사람들을 만나야한다는 이 사실이
바로 에스페란토가 추구하는 기본 원리가 아닌가 한다.
자유자재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 못해 쩔쩔매는 올리베로,
스테파니를 보면서 영어권 사람들에게
일종의 통쾌한 한 방을 날린 것 같은
못된 뺑덕 어미 심뽀가 되살아난다.
흥! 이 몸도 영어 땜시 얼마나 스트레스 받고 살았는데...
돈 날리고, 시간 날리고, 게다가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에 시달리며
흰머리에 주름살을 만들어냈는지, 저들이 알까?
영어에 대한 짝사랑을 어느덧 헌신짝처럼 버린
로자의 가슴속엔
복수 혈전의 열기가 모락모락 솟아난다.
이러면 안되지만.. 신난다!!
로베르토의 동양문화에 대한 관심과 한국 사랑은
정말 알면 알수록 놀라웠다.
옛날 특수학교를 리모델링하여 만든 그의 집에는
한국음식을 비롯하여 동양의 식재료들이 없는 것이 없었다.
고추장, 된장, 수제비, 고춧가루, 참기름, 깻잎, 무말랭이.신라면 등등, 선명한 한글이 박혀있는
수 많은 음식물들이 그의 선택을 기다리며 다소곳이
그의 LG냉장고에서, 음식저장고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한국의 대중가요들이 메들리로 나오는데 기가 찰 지경이다.
옛날 우리 부모님시대의 인기가수 고복수, 남인수, 진방남 부터
시작하여 신효범, 일기예보, 권진원, 서영은 등
한국에서는 그리 큰 인기를 끌지 못하고 있는
실력파 가수들의 노래가 쉼 없이 쏟아져 나왔다.
한국어도 비교적 다양하게 잘 알고 쓰기도 하는데
심지어는 ‘패 부러’라는 욕설 비스무레한 단어까지도 구사하며
우리를 웃겨 준다.

한국의 얼큰한 수제비에 침 흘리고
떡볶이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는 로베르토는
컴퓨터 프로그래머로서 아침과 저녁이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친절한 배려로 그의 집에 머물면서 보고 느낀 것은
하루에 저녁 한 끼만을 먹으면서 아침 점심시간에는
일에 집중하면서 먹지도 않고
생글생글 웃어주던 그 미소도 감추고
오직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녁이 되면 맛있는 동서양의 요리를 하면서
친구들을 초대하여 포도주에 흥겨운 수다에
콧노래까지 안주삼아
생기가 넘치는 로베르토가 되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말아보지 못한 김밥을 게으른 로자가
오늘 로베르토를 위해 요리한다고 했는데 큰일이다...
낼름낼름 사다 먹을 줄이나 알았지,
솔직히 해본 적이 없는데...
감자 껍질을 벗기는 폼을 보니 장난이 아니다.
칼질도 소 잡을 만큼이나 수준급이다.
이러다 완전불량 주부 들통 나기 쉽상 인데...어쩌나...
김밥을 만든다고 하니 널찍한 주방 서랍에서
김말이용 대나무 발이 척 나오고,
단무지도 잽싸게 대령이요, 참기름, 참깨 등등
말만하면 모든 재료가 척척 등장한다.
카라는 수제비 요리 삼매경에 빠져있고....
로자는 계란말이 한다 했지만 커다란 동그라미
뒤집기에 실패하고,,..
이거 나 땜시 한국의 명주부들 망신시키는 것이나 아닌지 원...
그래도 아리랑 콧노래를 양념삼아 김밥의 예술에 도전한다.
당근, 단무지, 파, 햄 등 울긋불긋 색조가 그럴듯하네...
오~벨라이 콜로로이!(오, 색깔이 아름다워요!)
시선 분산용 자화자찬에도 모른 척 환호성을 보내주는
로베르토가 오늘만큼은 최고다.
아래층에 살고 계신 어머니를 위해 김밥 한 접시 곱게 담고
성큼 성큼 내려가는 모습에서
부모님에 대한 공경은 국경을 넘고 인종을 초월한 진리임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한다.
카라의 매콤한 수제비 대신 불량 주부 로자의 알록달록
김밥이 당첨...(뿌듯 뿌듯)
일요일(6월 6일) 저녁에는 카라의 떡볶이가
선을 보이게 되는 날이다.
오후에는 태즈마니아주 북서쪽에 위치한
위너드라는 곳에 살고 있는 로베르토 동생 내외와
친구 살리아까지 합류했다.
로베르토는 스페인 전통음식인 감자와 소시지를 이용한
스프를 만들고
카라의 손끝에서는 매운 청량고추장 두 숟가락 듬뿍 쏟아 부은
떡볶이가 만들어지고...
오며가며 연신 보글거리는 냄새도 맡아보고
요리법도 물어보고 유심히 카라의 손끝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쳐다보는
이들의 눈동자에는 진지함 마저 묻어난다.
연신 ‘봉구스타(맛있어요)’를 외치는 이들을 보면서
이러한 오버는 요리하는 사람들에게 신바람을 주면서
또한 덩달아 뿌듯함도 함께 선사하겠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더군다나 하루 종일 쫄쫄 굶다가 먹는 저녁인지라
날라가는 알랑미 맨 밥에 오이지 한 쪼가리도
기가 막히게 맛있지 않을까?
어떠한 음식도 이 시간 로베르토에겐
환상적인 최고의 요리가 아닐까하는 잡생각이 살짝 든다.
카라와 로자가 요리를 잘 했다라기 보다는
너무 배가 고픈 로베르토의 침샘이 쉴 새없이 작동하여
맛깔난 음식으로 변신하게 한 것 임에 틀림없다.
정말 카라의 떡볶이는 그런대로 먹을 만 했는데
수제비는 정말 아니올시다였다는 것이
객관적인 로자의 평이다. (2%가 부족했음...)
게다가 다른 친구 야메소를 기다리다
퉁퉁 불어터져 버린 수제비인데 더 이상 말을 해 무엇하리....
로자의 아리랑, 무인도, 새타령이 디저트 처럼 흘러나온다.
오~트레 벨라이 칸토이!!(정말 아름다운 노래들이군요!!)
신디사이저와 기타를 연주하고 오카리나를 배우고 있는
로베르토가 한마디 한다.
그 나라 고유의 음악을 에스페란토로 번역해서 부르는 것에는
반대란다.
음악에 대해 뭔가를 아시는 분이다.
전통음악은 전통의 언어로 고유의 표현방식을 써야한다는
그의 견해에 박수를 보낸다.
바로 이러한 생각은 우리나라 최고의 음악가였던
세종대왕의 의견과 일치하는 것이다.

현대식으로 변신한 학교 건물에서 아름답고 친근한 우리 음악에
매콤 짭짤한 음식과 흥겨운 수다에
하루하루가 행복한 배! 째라 부부 호바트 여행의 일등공신은
단연 멋쟁이 에스페란티스토 로베르토이다.
잊을 수 없는 로베르토와의 만남으로
에스페란토의 위력은 딴 나라에서 더 큰 희망으로 다가왔다.
요하노의 집에서 고픈 배를 움켜잡고
채식주의자에 대한 원망의 시선을 아주 아주 쬐끔 보냈다면
로베르토의 집에서는 넘치는 한국음식 사랑으로
우린 점점 커지는 위장을 걱정하며
행복한 저녁을 매일 밤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