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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12   진보문화운동의 비판적 시선 (복거일)


진보문화운동의 비판적 시선 (복거일)
문화관련 글들(ktp) | 2007/06/12 23:04
 

6월민주항쟁20년기념 대토론회



주최 및 주관 :

공동 기획 및 진행 : 문화단체

3회 : 6월 혁명 뒤의 한국 문화 - 평가와 전망


복거일 (소설가, 미래문화포럼 대표)



1. 서언


개항 뒤 우리 사회는 서양 문화를 빠르게 받아들였다. 자연히, 큰 문화적 충격들과 급격한 사회적 변화들이 지속적으로 나왔고, 이념적 대립과 역사관에서의 혼란이 심했다.

우리 역사에 대한 수정주의적 견해들이 끊임없이 나오는 것은 그러므로 이상하지 않다. 수정주의적 충동은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명칭을 바꾸려는 시도들에서 잘 드러난다.

전형적인 예는 전통적으로 ‘동학란’이라 불린 역사적 사건이니, 그 반란의 주체인 ‘동학’이나 ‘농민’과 그것의 시점인 ‘갑오년’과 그것의 성격에 대한 평가인 ‘전쟁’이나 ‘혁명’의 여러 조합들이 이름으로 나와서 어지럽다. 당대 사람들이 붙인 ‘동학란’이라는 이름은 어느 사이엔가 사서들에서 사라졌다. 원래 어떤 역사적 사건을 가리키는 이름은 당대 사람들이 붙인 것이 가장 큰 정당성을 지닌다. 자주 바뀌면, 이름은 제 구실을 하기 어렵다. 역사적 사건의 이름을 굳이 바꾸려는 이들은, 관련된 자료들이 모두 알려졌고 현재의 역사학의 방법론이 더 나아질 여지가 없을 만큼 발전되어서, 후대인들이 다른 해석을 할 여지가 없다고 믿는 것이다. 그것은 오만한 환상이다. 더구나, 그런 태도는 역사에 대한 평가의 바탕이 되는 평가자들의 가치 체계들이, 인류와 문화의 진화에 따라, 끊임없이 바뀐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는다.

1987년 6월에 일어난 민주화 운동도 사정이 비슷하다. 그 역사적 사건이 아직 시간적으로 가깝다는 사정도 있겠지만, 서로 다른 견해들을 반영한 여러 이름들이 쓰인다. 가장 널리 쓰이는 이름들은 '6월 항쟁’과 ‘6월 혁명’이다. 이 자리를 마련한 분들은 전자를 따르는데, 필자는 후자가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 주최측에 대한 경의를 표하면서, 이 글에선 ‘6월 혁명’이란 이름을 쓰고자 한다.



2. 6월 혁명의 성격


1987년 6월의 민주화 시위로 시작되어 같은 해 10월 ‘직선제 헌법’의 제정으로 마무리된 민주화 운동에 대한 평가들은 다양하고 상당한 편차를 보인다. 그런 사정은 그 역사적 사건을 부르는 이름들에 반영되었다. 그 이름들은 대체로 ‘항쟁’과 ‘혁명’으로 나뉜다. 그 사건의 성격과 성과에 대한 평가에서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큰 뜻을 부여한다.

1987년의 민주화 운동을 혁명으로 간주하는 데 대한 반론으로 먼저 나오는 것은 그것이 혁명을 구성하는 요건들을 갖추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그 사건은 혁명의 특징적 정의(ostensive definition)의 요건들을 완벽하게 갖추지 못했고, 무엇보다도, 집권 세력의 뚜렷한 교체를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정신과 성과를 살피면, 우리는 그것이 진정한 혁명이었을 뿐 아니라 보기 드물게 성공적인 혁명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정신에서그것은 비정상적인 정치적 상태를 교정하려는 노력이었다. 시민들은 당시의 헌법과 권력 집단이 우리 사회의 구성 원리인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하지 못해서 정당성을 잃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것은 옛 사람들이 ‘반정(反正)’이라 부른 혁명이다.

성과에서도 그것은 혁명적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할 만한 혁명의 정의는, 월터 래커(Walter Laqueur)를 따르면, “정부 체계에서 근본적 변화를 이루려는 시도(an attempt to make a radical change in the system of government)”다. 6월 혁명은 처음부터 정부 체계에서 근본적 변화를 이루려 했다. 그것은 ‘직선제 헌법’의 제정을 목표로 삼았고 그 목표를 성공적으로 이루었으며, 그 헌법은 그 뒤 20년 동안 우리 사회의 근본적 규범으로 원활하게 기능했다.

혁명의 과정에서 치른 비용도 아주 작았다. 폭력의 수준은 아주 낮았고 폭력의 희생자들과 사회적 비용도 적었다. 정치적 불안은 비교적 작았고 경제의 위축은 전혀 없었다. 경제 성장률에서 이 점이 잘 드러나니, 1986년의 성장률 11.0%는 1987년의 11.0%로 이어졌고, 1988년엔 10.5%였다. 그런 뜻에서, 6월 혁명은 탈냉전 시대에 나온 ‘빛깔 혁명(color revolution)’―매우 낮은 수준의 폭력을 통해서 혁명적인 정치적 변화를 이룬 혁명―의 선구였다.

6월 혁명은 ‘항쟁’이라 부르는 것은 그래서 그 성공적 혁명에 대한 정당화되기 어려운 폄하다. 저항(resistance)의 뜻으로 쓰이든 반란(revolt 또는 rebellion)의 뜻으로 쓰이든, 항쟁이란 말엔 부정적 함의들이 들어있다. 그것은 부당한 강제에 순응하기를 거부할 따름이지 사회 제도를 적극적으로 변환하거나 권위의 정통성을 새로 세우려는 노력은 하지 않으며, 자연히, 이룬 성과나 영향이 크지 않다는 함의를 품는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직선제 개헌’이라는 뚜렷한 목표를 내세워 정권의 정통성을 새로 세우려 나섰고 그것을 성공적으로 이룬 시민운동을 항쟁이라 부르는 것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그 중요한 사건에 대한 폄하일 수밖에 없다.

6월 혁명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그것이 제한된 목표를 겨냥했다는 사실이다. 그 혁명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구성 원리인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믿음을 지녔고 체제의 전복을 바라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압제적이고 정통성이 없는 정권을 민주적이고 정통성을 지닌 정권으로 바꾸려 했다. 대한민국의 이념과 체제에 대해 비우호적인 사람들에겐 그 점이 오히려 6월 혁명을 낮게 평가할 요소가 되겠지만, 바로 그 점이 그것을 그리도 성공적인 혁명으로 만들었다.


“자신들에게 제한된 목표들만을 부과하는 혁명들은, 만일 그것들이 인민 다수의 희망들을 대변한다면, 진정한 개혁들을 이루는 데 성공할 수 있다. 혁명이 폭력적일수록, 그래서 사용된 강제의 양이 클수록, 겉으로는 짧은 ‘과도기’ 동안만 존속하도록 설립된 독재 체제가 영구적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사회의 전체적 변환을 겨냥한 혁명들은 다수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한다고 주장하지만, 다수는 자신의 가장 나은 이익이 어디 있는지 깨닫지 못하므로, 그것을 위한 결정을 내리는 일은 소수의 전위에게 남겨진다. 결과적으로 극심한 압제가 영구적으로 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회가 출현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 국가는 국가 경제나 국방과 같은 각종 분야들에서, 괄목할 만한 결과들을 이룰 수도 있지만, 과거의 경험으로 판단하건대, 그것은 보다 자유롭고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세우는 일에선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월터 래커, ‘혁명’, <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the Social Sciences>]


6월 혁명은 전 과정에서 아주 낮은 수준의 폭력만을 불렀고, 압제적 정권의 권력을 무너뜨리는 폭발적 과정이 잘 통제되었고, 덕분에 사회적 비용이 아주 낮았으며, 반동적 움직임을 부르지 않았다. 덕분에 우리 사회는 보다 자유롭고 보다 정의로운 사회가 되었다. 그렇게 제한된 목표를 향해 천천히 “기어가는 혁명(creeping revolution)”이었던 데에 6월 혁명이 성공한 비밀이 있다.



3. 6월 혁명 뒤 한국 사회의 진화


사회의 진화는 경제 분야에서 가장 뚜렷이 드러난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통찰대로, 경제 분야의 진화는 다른 분야들의 진화의 바탕이 된다.

여러 지표들은 우리 경제가 6월 혁명 뒤 대체로 무난하게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1986년에서 2005년까지 19년 동안, 국내총생산(GDI)은 1,076억 달러에서 7,875억 달러로, 1인당 소득은 2,550달러에서 16,291달러로, 수출은 347억 달러에서 2,844억 달러로, 수입은 316억 달러에서 2,612억 달러로 늘어났다. 덕분에 우리 시민들은 평균적으로 크게 부유해졌고, 우리 사회는 전반적으로 풍요로워졌다.

이런 경제 성장은 당연히 사회의 급격한 변화를 불렀다. 실은 경제 성장 자체가 가장 중요한 변화다. 사람의 행동은 소득과 밀접한 관련을 지녔다.

이런 경제 발전은 경쟁을 통한 진화의 과정이 상당히 원활하게 이루어졌음을 가리킨다. 경쟁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갖가지 실험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한다. 실로 자유민주주의 이념과 시장 경제 체제의 우수성은 바로 거기서 나온다.

근년에 좌파 정권이 거듭 들어서면서, 우리 사회의 구성 원리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에 거스르는 정책들이 시도되었다. 그런 정책들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경제적 실험들을 억제했다. 줄어든 실험들은 진화 과정의 재료들을 줄였고, 비효율적인 진화는 투자의 위축을 불렀다. 근년에 우리 경제가 보인 침체의 큰 부분은 그런 사정에서 찾을 수 있다.

경제의 진화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것은 기술의 진화다. 이용할 수 있는 기술은 경제 발전의 기본적 조건이고, 경제 발전은 기술의 환경을 넓힌다.

기술은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생산 활동에 쓰이는 물리적 기술(Physical technology)이니, 이것이 통상적으로 기술이란 말이 가리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회를 조직하는 데 쓰이는 사회적 기술(Social technology)이다. 좀 낯선 개념이지만, 사회 발전에 관한 연구를 통해서 사회적 기술의 중요성이 드러났다.


“경제적 진화는 단일 과정이 아니라, 세 개의 서로 연결된 과정들의 결과다. 첫째는 역사상 경제 성장의 결정적 요인이었던 기술의 진화다. 가장 주목할 만하게, 1750년경의 경제 성장에서의 급격한 상승은 산업 혁명의 위대한 기술적 도약과 일치한다. 그러나 기술의 진화는 이야기의 한 부분일 따름이다. 진화경제학자인 컬럼비아 대학의 리처드 넬슨은 실은 경제 성장에서 주요 역할을 하는 기술에는 두 유형이 있음을 지적했다. 첫째는 ‘물리적 기술’이다 이것은 청동 제조 기술, 증기 기관들, 그리고 미세 칩들과 같은 것들처럼 우리가 기술이라고 생각하는 데 익숙한 것이다. 반면에, ‘사회적 기술들’은 일들을 하도록 사람들을 조직하는 방식들이다. 사례들은 정착 농업, 법의 지배, 화폐, 주식회사들, 그리고 모험자본을 포함한다. 물리적 기술들이 분명히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지만, 사회적 기술들의 공헌도 마찬가지로 중요했으며, 실은 그 둘이 서로 공진화한다고 넬슨은 지적한다. 산업 혁명 동안에, 예컨대, 18세기 리처드 아크라이트의 방적기의 발명(물리적 기술)은 대공장 방직을 조직하는 것(사회적 기술)을 경제적으로 만들었고, 그것은 다시 수력, 증기, 그리고 전기를 제조에 적용하는 많은 발명들(다시 물리적 기술들로 돌아옴)이 나오도록 도왔다. 농업, 산업, 그리고 정보 혁명들은 모두 대체로 물리적 기술들과 사회적 기술들 사이의 상호적 무도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에릭 바인호커(Eric D. Beinhocker), <부의 기원(The Origin of Wealth)>]


그러나 모든 일들은 궁극적으로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기술들이 실제로 적용되려면, 그 일을 맡을 만한 사람들이 나와야 한다.


“그러나 물리적 및 사회적 기술들의 공진화는 그림의 3분의2일 따름이다. 기술들은 그것들만으로는 아이디어들과 설계들에 지나지 않는다. 방직을 위한 물리적 기술은 방직 기계 자체는 아니다―누군가 그것을 실제로 만들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공장을 위한 사회적 기술은 공장이 아니다―누군가 그것을 실제로 조직해야 한다. 기술들이 세상에 충격을 주려면, 어떤 사람이나 어떤 사람들의 집단이 물리적 및 사회적 기술들을 개념들에서 실재로 바꾸어야 한다. 경제 분야에서, 그 역할은 기업에 의해 행해진다. 기업들은 물리적 및 사회적 기술들을 서로 융합해서 그것들을 제품들과 서비스들이라는 형태로 환경에 배출한다.” [바인호커, 같은 책]


우리 사회의 발전을 가능하게 한 물리적 기술, 사회적 기술, 그리고 기업 모형들은 거의 모두 해외에서 들어왔다. 우리 사회가 세계를 향해 많이 열린사회라는 사실은 그래서 중심적 중요성을 지닌다. 잘 알려진 것처럼, 우리 사회는, 특히 경제 분야는, 해외의존도가 무척 높다. 아울러, 세계화는 급속하게 진행되어왔다. 자연히, 우리 사회의 진화는 본질적으로 세계의 여러 사회들이 하나의 공동체로 통합되는 세계적 진화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근년에 우리 사회는 문화 발전의 바탕을 빠르게 키웠다. 풍요로워진 경제는 가능한 문화의 영역을 크게 늘렸다. 빠르게 발전해온 물리적 기술은, 특히 컴퓨터, 인터넷, 휴대 전화와 같은 정보 처리 기술은, 새로운 사회적 기술과 결합해서 사람들의 행동 양식에 큰 영향을 미쳤고 새로운 문화를 낳도록 했다.



4. 문화의 진화


가장 너른 뜻에서, 문화는 “비유전적 정보의 전달(nongenetic transmission of information)”이라 정의된다. 생명체들의 유전을 통한 정보의 전달을 빼놓고, 나머지 모든 정보의 전달을 문화라고 보는 것이다. 많은 고등 동물들은 비유전적 정보의 전달을 하며, 당연히, 그들의 그런 행위들도 문화다. 물론 그렇게 전달되는 문화의 양과 수준은 사람의 그것에 비기면 아주 작다. 그래도 그런 사정은 문화를 이처럼 너르게 정의하는 것이 깔끔할 뿐 아니라 문화의 본질을 잘 파악했음을 가리킨다.

문화의 기본 단위는 밈(meme)이다. 유전자와 마찬가지로, 밈은 진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을 퍼뜨리는 ‘복제자(replicator)’다. 그렇게 밈들이 경쟁하면서 문화는 진화한다.


“밈의 예들은 곡조들, 생각들, 구호들, 의복 유행들, 냄비들을 만들거나 홍예들을 쌓는 방식들이다. 유전자들이 정자들이나 난자들을 통해서 몸에서 몸으로 뛰어 건너면서 유전자 풀에서 자신들을 전파하는 것과 똑같이, 밈들은 넓은 뜻에서 모방이라고 불릴 수 있는 과정을 통해서 뇌에서 뇌로 건너뛰면서 밈 풀에서 자신들을 전파한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이기적 유전자(Selfish Gene)>]


문화적 복제자로서의 밈은 유전적 복제자로서의 유전자와 아주 비슷한 방식으로 자신을 전파한다.


“밈의 표현형적 효과들은 낱말들, 음악, 시각적 심상들, 의복의 스타일들, 얼굴이나 손으로 하는 몸짓들, 박새들이 우유병을 열거나 일본 마카크 원숭이들이 밀을 이는 것과 같은 기술들의 형태를 할 수 있다. 그것들은 뇌 안에 있는 밈들의 바깥으로 드러나고 볼 수 있는 (들을 수 있는 등등의) 표현들이다. 그것들은 다른 개체들의 감각 기관들에 의해서 감지될 수도 있고, 그것들은 받아들이는 개체들의 뇌들에 자신들을 각인하여 원래의 밈의 복제(꼭 정확하지는 않은)가 받아들이는 뇌에 새겨지도록 할 수도 있다. 그 밈의 새로운 복제는 이제 그것의 표현형적 효과들을 널리 펼 수 있는 처지가 되고, 그것 자신의 더 많은 복제들이 또 다른 뇌들에서 만들어지게 된다.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우리의 전형적 복제자인 디.엔.에이로 돌아가면, 그것의 세계에 대한 결과들은 두 가지 중요한 유형들로 이루어졌다. 첫째, 세포의 복제 기구를 이용하는 방식 등으로, 그것은 자신의 복제들을 만든다. 둘째, 그것은 외부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데, 그런 영향은 그것의 복제들의 생존 가능성에 영향을 미친다. 이 두 효과들 가운데 첫째는 밈이 자신의 복제들을 만들기 위해서 개체들 사이의 의사소통과 모방의 기구들을 이용하는 것에 상응한다. 개체들이 모방이 흔한 사회적 풍토에서 산다면, 이것은 디.엔.에이를 복제하는 효소들이 풍부한 세포적 풍토에 상응한다.

그러나 디.엔.에이의 둘째 효과에 관해선, 즉 종래에 ‘표현형적’이라 불린 종류에 관해선, 어떠한가? 밈의 표현형적 효과들이 복제에서의 성공이나 실패에 어떻게 공헌하는가? 답은 유전적 복제자들에 대해서와 같다. 어떤 밈이 그것을 지닌 몸의 행태에 대해서 지닌 영향은 그 밈의 생존 가능성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그것의 몸들을 절벽 너머로 달려가도록 만든 밈은 그것의 몸을 절벽 너머로 달려가도록 만드는 유전자의 운명과 같은 운명을 가질 것이다. 그것은 밈 풀에서 제거되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몸의 생존을 돕는 것이 유전적 복제자들의 성공을 구성하는 것들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과 똑같이, 밈들이 자신들의 보존을 위해서 표현형적으로 작용하는 데는 많은 다른 길들이 있다. 만일 한 밈의 표현형적 효과가 한 곡조라면, 따라 부르기 좋을수록 그것은 복제될 가능성이 높다. 만일 그것이 과학적 생각이라면, 세계의 과학적 뇌들 속으로 그것이 퍼져나갈 가능성은 이미 확립된 생각들의 집적과의 양립성에 영향을 받을 것이다. 만일 그것이 정치적 또는 종교적 생각이라면, 그것의 표현형적 효과들 가운데 하나가 그것의 몸들을 새롭고 낯선 생각들에 대해 격렬하게 비관용적으로 만들 경우, 그것은 자신의 생존을 도울 수도 있을 것이다. 밈은 자신의 복제 기회들과 자신의 표현형적 효과들을 가졌으며, 밈의 성공이 유전적 성공과 무슨 연관을 가질 이유는 없다.”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 <통섭(Consilience)>]


따라서 문화를 지닌 종들에선 진화가 유전적 요인들만이 아니라 문화적 요인들에 의해서도 이루어진다. 이러한 ‘유전자-문화 공진화(gene-culture coevolution)’는 물론 사람에게 가장 중요하다.


“문화적 진화의 속도가 빠를수록, 유전자들과 문화 사이의 관련은, 비록 완전히 끊어질 수는 없지만, 점점 느슨해진다. 문화는 상응하게 정확한 유전적 규정 없이 발명되고 전수되는, 정교하게 조율된 적응들을 통해서 환경에서의 변화들에 대한 빠른 조정을 허용한다. 이 면에서 인류는 모든 다른 동물 종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 유전자-문화 공진화는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라는 보다 일반적인 과정의 특별한 확장이다.” [에드워드 윌슨, 같은 책]


밈들이 경쟁해서 보다 나은 것들이 선택되고 퍼지므로, 선택의 재료가 많을수록 문화는 활발하게 진화한다. 따라서 문화의 빠르고 성공적인 진화의 비결은 밈들의 다양성이다.



5. 6월 혁명 뒤의 한국 문화


6월 혁명 뒤, 다시 자유로워진 사회에서 문화는 활기를 되찾았고 빠르게 바뀌는 환경에 대체로 잘 적응했다. 여러 지표들은 우리 문화가 아직 바람직한 모습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음을 보여주지만, 큰 사회적 혼란이나 정체는 없었다. 이것은 결코 작지 않은 성취다.

특히 중요한 성취는 지식을 많이 갖춘 ‘지식인 대중’의 빠른 성장에 걸맞은 대중문화의 발전이었다. 높아진 소득은 많은 시민들이 흔히 ‘문화’로 불리는 오락과 예술을 누리도록 했다. 그래서 모든 분야들에서 시장에서 나타나는 대중의 판단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이런 현상은 대중의 판단보다 전문가들의 판단이 우월적 지위를 누려온 예술에서도 뚜렷하니, 시장의 판단에 가장 끈질기게 저항해온 문학을 포함해서, 모든 예술 장르들이 이미 대중의 판단을 궁극적 기준으로 삼는다. ‘좋아서 많이 팔리는 것이라기보다는 많이 팔리니 좋은 것이다.’

그래서 오락 산업이 크게 발전했고, 해외 여행이 가파르게 늘어났다. 해외 문화의 유입이 늘었고, 사회적 금기들은 크게 줄어들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소비자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대중적 문화와 예술이 자연스럽게 주류로 자리 잡았다. 만화와 전자오락과 같은 장르들이 중요해졌고 전통적 예술인 문학에서도 추리소설이나 환상소설과 같은 장르들이 번창했다. 텔레비전은 여전히 사회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면서 문화의 모습을 다듬어냈다. 20세기 말엽엔 새로운 통신 수단인 인터넷이 더해져서, 시민들의 정보 처리 능력을 혁명적으로 늘렸다.

한국 문화가 원숙해지고 나름의 특질을 지니게 되면서, 한국 예술 작품들은 해외에서 시장을 찾았다. ‘한류’라는 이름을 얻은 이런 현상은 한국 예술에 큰 동력을 더했고 발전 방향을 제시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사회를 끊임없이 효율적으로 만들었고 그런 변화는 사람들의 감성과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세계화가 진전되면서, 나라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이내 직접적으로 시민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지식인 대중의 중심적 역할은 우리 언어의 진화에서 두드러졌다. 영어가 세계의 표준 언어가 되었다는 사정과 우리 사회가 빠르게 세계를 향해 열린 사회가 되었다는 사정이 어울리면서, 한국어는 영어의 영향을 크게 받으면서 진화했다. 그런 진화의 결과에서 나온 한국어의 모습에 대한 평가를 떠나, 그런 진화는 필연적이고 궁극적으로 한국어의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점은 강조되어야 한다. 환경의 변화에 맞추어 진화하지 못하는 언어는 사용자들로부터 버림받을 따름이다.


6. 전체주의의 부정적 영향


제5공화국의 압제적 통치 아래서, 우리 사회엔 전체주의적 사조가 점점 널리 퍼졌다. 전체주의가 압제적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유효한 이념이라는 생각이 널리 자리 잡았다는 사정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전체주의 사조는 6월 혁명 뒤에도 큰 세력을 이루었다. 우리 사회의 구성 원리인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적대적인 이념이 세력을 얻은 일이 좋은 결과를 낳기는 물론 어렵지만, 전체주의의 확산은 우리 사회의 문화에 특히 큰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전체주의는 문화에 특히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전체주의는 개인들의 자유롭고 다양한 삶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풍토에서 문화가 발전할 수는 없다.


“모든 집단주의적 체계들의 공통된 특질들은, 모든 분파들의 사회주의자들에게 늘 소중한 구절을 쓰면, 확정된 사회적 목표를 위한 사회의 노동의 의도적 조직이라고 기술될 수 있다. […] 갖가지 종류의 집단주의, 공산주의, 파시즘 등은 사회의 노력들을 몰아가고자 하는 목적의 성격에서 서로 다르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사회 전체와 그것의 모든 자원들을 이 단일 목표를 위해 조직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개인들의 목표들이 가장 중요한 자율적 분야들을 인정하기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 및 개인주의와 다르다.” [하이에크(Friedrich A. Hayek), <예종에의 길(The Road to Serfdom)>]


공산주의든, 민족사회주의든, 다른 사회주의의 분파들이든, 전체주의는 다른 이념이나 세력과 공존하는 것을 거부한다. 전체주의는 사회에서 다른 세력과의 공존을 거부하고 사회의 완전한 통제를 추구하며 밖으로는 다른 나라들을 공격하는 확장주의적 정책을 추구한다.

허버트 스피로(Herbert J. Spiro)에 따르면, 전체주의 체제들의 중요한 특질들은 아래와 같다.

1) 산업화, 인종적 지배, 또는 무산계급의 통합과 같은 단일의 적극적으로 공식화된 실질적 목표의 공약과 그것에 따르는 절차적 안정성의 유지에 대한 공약의 부재,

2) 어제의 영웅이 오늘의 반역자가 되고 오늘의 충성스러운 행동이 내일의 전복적 활동이 되는, 절차적 동요의 상태에서 연유하는 예측불가능성과 불확실성,

3) 군대, 준군사조직, 제복 입은 경찰 및 비밀 경찰에 의한 조직적 폭력의 대규모적 사용,

4) 정권의 실체적 목표에 맞춰지지 않은 조직들과 단체들을 길들이거나 억압하기 위한 노력들,

5) 단일 목표에 헌신하는 공공 조직들에 대한 전반적 참여를 강요하기 위한 노력들,

6) 전체주의 체계 자체의 심상에 맞추어 전 인류를 다시 만들려는 목표의 보편화.


자유주의와 전체주의는 뚜렷이 대조적이다. 두 이념들의 본질적 차이는 개인들의 자유에 대한 태도에서 나온다. 하나는 개인들의 자유가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가치를 지녔다고 여기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집단적 목표에 봉사해야 한다고 여긴다.

전체주의가 떠받드는 사회적 집단은 전체주의 분파마다 다르다. 그들에게 공통된 점은 인종, 민족, 국가, 종교, 또는 계급과 같은 기준들에 따라 특정 집단을 높이고 다른 집단들에 대해 적대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결코 인류 전체를 기본적인 사회적 단위로 보지 않는다. 이런 특수주의(particularism)가 보편주의(universalism)을 추구한 종래의 이념들과 전체주의를 나누는 본질적 특질이다.

반면에, 자유주의는 보편주의를 따른다. 그래서 늘 인류를 시야에서 놓치지 않고 인류를 구성한 개인들 사이의 차이를 차별의 근거로 삼지 않는다. 성, 인종, 민족, 국가, 종교, 또는 계급과 같은 것들은 개인들을 차별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보편주의는 궁극적으로 인류라는 종(種)의 차원에서 개인들과 사회들을 바라보게 한다. 그리고 그렇게 보편적인 관점은 본질적으로 개인들에 주목하게 되어 끝내는 자유주의로 귀착될 것이다.


전체주의가 필연적으로 부르는 개인들의 억압과 사회적 정체는 예술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예술이 늘 자유와 보편성을 지향하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본질적으로 개인들을 다룬다. 예술가는 작품을 통해서 개인들의 혼란스러운 경험들에 질서를 부여한다.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의 진정한 대상이 개인들이지 어떤 사회적 단위라고 여기지 않는다. 바로 그 점이 예술과 예술가들을 보편주의로 이끈다.

예술가들의 이런 태도는 19세기 프랑스 역사가 르낭(Joseph Ernest Renan)의 얘기에 잘 요약되었다: “사람은 그의 언어에도 그의 민족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자신에게만 속한다, 왜냐하면 그는 자유로운 존재, 즉 도덕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모든 진정한 예술 작품들은 궁극적으로 도덕적 선언이다. 진정한 작가는 도덕적 존재일 수밖에 없다.

이런 사정은 예술이 일반적으로 개인들의 노력이라는 사실을 잘 설명한다. 때로 둘 이상의 예술가들이 자발적으로 협력하여 작품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들은 ‘규칙을 증명하는’ 드문 예외들이다. ‘집단적 창작’을 북돋우기 위해 전체주의 정권들이 무던히 애썼지만, 그런 시도들은 진정한 예술 작품을 낳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도 1990년대 초엽에 좌파 문인들이 ‘집단적 창작’을 시도했었다. 공산주의의 공식 예술 이론이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socialist realism)’에 정통한 문학 비평가들의 지도 아래 작가들이 협력하여 문학 작품들을 생산하자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그런 시도는 이념으로 작가들의 상상과 표현을 억압하는 일이어서,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났다.

반면에, 전체주의자들은 자유롭고 도덕적인 개인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도덕적인 것은 자신의 민족으로부터 자유롭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다”라는 프랑스 문필가 바레스(Auguste Maurice Barres)의 주장은 이런 태도를 잘 보여준다. 그들에게 개인은 자신의 도덕을 가진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다. 개인들의 도덕은 전체주의 국가가 그들에게 내리는 지시들을 따르는 것이다. 전체주의는 본질적으로 도덕의 우위를 부정하고 그런 점에서 가장 깊은 수준에서 부도덕하다.


“마키아벨리가 군주에게 마키아벨리안 행동 계획을 수행하라고 조언할 때, 그는 그 행동들에 어떤 종류의 도덕성이나 아름다움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에게 도덕성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뜻하는 것이며, 그것이 정치와 양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가 (안타까움이 없지 않게) 지적한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군주는 늘 선을 실천할 마음이 있어야 하지만, 그는 어쩔 수 없는 경우엔 악 속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고 마키아벨리는 말한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그는, 비록 정치를 돕는 경우에라도, 악은 그대로 악으로 남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대의 현실주의자들은 현실주의의 도덕론자들이다. 그들에게, 국가를 강하게 만드는 행위는 그렇게 한다는 사실에 의해 도덕적 성격이 부여되고, 그 행위가 무엇이든 그렇다. 정치에 봉사하는 악은 악이기를 그치고 선이 된다. [쥘리앙 방다(Julien Benda), <지식인들의 배반(La Trahison des Clercs)>]


예술은 가장 근본적 수준에서 도덕적이다. 도덕을 부정하므로, 전체주의는 예술을 병들게 하고 전체주의 사회엔 올바른 뜻에서의 예술가가 존재할 수 없다.

다음엔, 전체주의를 따르는 예술가들은 예외 없이 자신들의 정치적 감정을 예술 작품들에 불어넣는다. 그런 정치적 감정은 필연적으로 작품들을 인도하고 왜곡한다. 방다는 폴 클로델(Paul Louis Charles Claudel)이나 다눈치오(Gabriele D’Annunzio)의 시들이 표현한 정치적 감정이 “단순함을 아예 다 잃고, 그것의 적에 대한 차가운 경멸이 담긴, 의식적이고 조직화된 감정”이라고 말했다. 방다는 전체주의를 추종한 소설가들과 극작가들에 대해 “그들의 주인공들이 인성의 진정한 관찰과 맞게 느끼고 행동하는 대신, 그들은 작가들의 감정이 요구하는 대로 주인공들이 느끼고 행동하도록 만들었다”고 평했다. 그런 사람들은 진정한 예술가들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따르는 이념을 위해서 예술이 봉사하도록 만드는 정치가들이다. 그런 선택에 대해 그들이 치르는 값은 보편성을 잃은 작품들이다. 이것이 전체주의 사회에서 진정한 예술과 예술가들이 존재하기 어려운 둘째 이유다.

셋째, 전체주의 정권은 모든 사회적 자원을 하나의 집단적 목표에 바치고 개인들이 그런 목표를 위해 봉사할 것을 강요한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예술은 선동선전(agitprop)의 수단이 되어 집단적 목표에 봉사하도록 강요된다. 예술에 대한 이런 강요는 전체주의가 본질적으로 대중의 정치적 동원에 바탕을 두고 선동선전이 그런 동원의 중심적 수단이라는 사정에서 비롯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전체주의가 예술을 궁극적으로 경멸한다는 점이다. 전체주의는 예술이 선동선전의 수단이 되는 한도까지만 예술을 존중하고 허용한다. 역사상 전체주의보다 예술과 예술가들을 더 경멸한 이념은 없었다. 선동선전의 수단이 되면, 아무리 그럴듯하더라도, 예술은 이미 예술일 수 없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진정한 예술과 예술가들이 존재하기 어려운 셋째 이유가 거기 있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예술이 번창하지 못하는 넷째 이유는 전체주의 사회 자체가 정체한다는 사실이다. 예술 작품들은 새로운 질서를 찾는 예술가들의 노력에서 나온다. 예술가들은 새로운 사람들의 경험들에서 새로운 질서를 찾으려 애쓴다. 그런 예술적 욕구는 늘 새롭게 나온다. 그러나 전체주의는 전체주의 사회가 이미 가장 나은 질서를 이루었고 그런 질서는 최고 지도자에서 완전히 구현되었다고 상정한다. 따라서 예술가들이 새로운 질서를 찾는 것은 전체주의 이념과 체제에 어긋난다. 예술은 이미 자신의 임무가 자세하게 규정되었으며 새로운 질서를 찾아 나설 필요가 없다고 늘 자신에게 일러야 한다. 이것은 예술에겐 치명적 상태다.


“진정한 생명적 일체성은 충족, 얻음, 도착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세르반테스가 오래 전에 얘기했듯이, ‘길은 언제나 주막보다 낫다.’ 어떤 시기가 그것의 욕망들을, 그것의 이상을, 충족했을 때, 이것은 그 시기가 더 이상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욕망의 우물이 말라버렸다는 것을 뜻한다. 말하자면, 우리의 유명한 풍요는 실은 끝남이다. 행복한 수펄이 혼인 비행 뒤에 죽듯이, 자신들의 욕망들을 새롭게 할 길을 알지 못해서 자기만족으로 죽는 세기들도 있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 <대중의 반역>, ‘Unwin Books’의 역자 비공개 영역본]


위에서 살핀 것처럼, 전체주의는 본질적으로 예술에 적대적이다. 실제 상황은 더욱 나쁘다. 전체주의의 경제적 질서는 ‘노동의 지도’를 포함한다. 즉 전체주의 사회에선 개인들이 자신들의 직업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히, 어떤 개인이 자유롭게 작가가 될 수도 없고 자유롭게 그만둘 수도 없다. 중앙의 계획 기구에 의해 선택된 개인들이 작가들과 예술가들이 될 수 있고 그들이 하는 일들은 본질적으로 체제에 봉사하는 것들에 국한된다. 달리 말하면, 그들은 선동선전 일꾼들이 되어야 하며, 다른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다.

예술이 선전선동의 수단이 되고 예술가들이 노동의 지도를 통해서 작업을 배정받으므로, 전체주의 사회들에서 예술 작품들은 필연적으로 엄격한 검열을 받게 된다. 검열이야 모든 사회들에서 있었지만, 전체주의 사회들에선 그것은 예술을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요소가 된다.


“검열은 독일의 민족사회주의자들과 러시아의 공산주의자들의 두 전제정치 아래서 치명적 심각성을 지닌 문제가 되었다. ‘진정한 독일 예술’을 옹호하면서, 독일 민족사회주의자들은 1937년에 뮌헨에서 ‘퇴폐적 예술’ 전람회를 열어 ‘퇴폐적 볼셰비키와 유대인 예술’을 비웃었다.

작품들이 추방된 예술가들은 조르쥬 그로스, 바실리 칸딘스키, 마르크 샤갈, 그리고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흐너를 포함했다. 스탈린의 검열관들도 똑같이 야만적이었다. 그들이 선호한 스타일은 ‘사회주의 리얼리즘(socialist realism)’―근로자들이 접근할 수 있는 조형적 작품들―이었고 소련 예술가들은 자신을 ‘검열과 자아 비판’에 맡기도록, ‘그 자신의 국가 검열관’이 되도록 요구되었다. 선동적 문학은, 특히 성경과 다른 종교적 저작들은, 소련 공산주의자들에겐 저주받는 것들이었다.

천안문 광장 사태 이후 중국의 예술적 표현에 대한 탄압은 스탈린주의의 가장 나쁜 관행들을 떠올리게 한다. 중국의 가장 뛰어난 영화감독들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들의 작품들은 홍콩의 1992년 국제 영화제에 아예 나오지 않았다.” [<역사에서의 검열(Censorship through the Ages)>,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 1993년 12월 26일자]


전체주의 국가는 필연적으로 권력을 지닌 소수의 전제적 정치가 되고, 이어 개인숭배가 나오므로, 작가는 궁극적으로 권력을 칭송하는 일만 하게 된다. 그렇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전체주의 사회에선 진정한 예술가가 존재할 수 없다. 예술가로 불리는 사람들은 모두 실제로는 선동선전 요원들이며 그들의 노력들은 근본적으로 진정한 작가들이 이루려고 애쓰는 것들에 대척적이다. 만일 진정한 예술가가 존재한다면, 소련의 만델쉬탐(Osip Mandelshtam), 파스테르나크(Boris Pasternak), 솔제니친(Alexander Solzhenitsyn)처럼, 그는 공식적으로는 예술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박해를 받을 것이다.


위에서 살핀 것처럼, 전체주의는 자유로운 문화를 허용하지 않는다. 특히 예술을 경멸하고 이용하며 가장 근본적 수준에서 타락시킨다. 근년에 우리 사회에서 높이 차오른 전체주의 사조는 어쩔 수 없이 우리 문화에, 특히 예술에, 나쁜 영향을 미쳤다.



7. 문화의 진화에 대한 전망


근년에 우리 사회는 상당히 침체했다. 이념적으로 사회주의적 색채가 짙은 정권이 들어서면서, 우리 사회의 구성 원리에 맞지 않는 정책들이 추구되었다. 그런 사정은 정치적 분란과 경제적 혼란을 불렀다.

다행히도, 우리 시민들은 그런 사정에서 교훈을 얻은 듯하다. 따라서 우리 사회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활력을 되찾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런 경제적 바탕에서 우리 문화도 활기를 지니고 진화할 것이다.

개항 뒤에 나온 빠른 사회적 변화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시장 경제의 발전과 핵가족의 출현으로, 혈연이 크게 약화되었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훨씬 계산적이 되었다. 시골의 공동체적 삶에 바탕을 둔 관계는 도시의 개인주의적 삶에 바탕을 둔 사업적 관계로 대치되었다.

이런 상황은 새로운 문화를 부른다. 새로운 과학 지식에 바탕을 두고 빠르게 바뀌는 사회 환경에 맞는 이념과 관행들을 창조하는 일이 시급하다. 그것은 물론 힘든 과제다. 그러나 한국 사회가 지금까지 보인 성공적인 발전은 앞으로도 한국 사회가 성공적으로 진화하리라는 전망을 떠받친다.

여기서 살필 것은 그런 진화가 우리의 정체성을 보다 뜻 깊게 다듬으리라는 점이다. 어떤 사람의 정체성은 본질적으로 미래의 환경에서 그가 차지할 자리를 가리킨다. 과거의 환경에서 그가 차지했던 자리가 아니다.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적 유산들은 그가 그런 자리를 차지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뜻을 지닌다. 즉 정체성은 미래지향적이다.

이 점을 잘 설파한 사람은 오르테가 이 가세트다. 그는 삶의 본질을 ‘미래에 대한 관심’으로 보았고 그런 관점에서 ‘한 국가가 존재하려면, 그것이 미래를 위한 목적을 지니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지적했다. 그의 관점을 따르면, 국민의 본질적 특질은 ‘미래를 공유하는 사람들’이다. 그는 과거의 공유만으로는 국가를 이룰 수 없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자신의 조국인 스페인과 라틴 아메리카가 ‘공통된 과거, 공통된 언어, 공통된 민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공통된 미래’를 지니지 못해서 결국 영구적으로 나뉘었다는 사실을 들어 자신의 주장을 떠받쳤다.

국적의 취득에 관한 일반적 관행들을 살피면, 우리는 오르테가의 주장이 암묵적으로 받아들여져 왔음을 깨닫게 된다. 사람은 출생에 의한 ‘생래적(生來的) 취득’이나 혼인. 입양. 인지나 귀화에 의한 ‘전래적(傳來的) 취득’을 통해서 국적으로 얻는다. 사람들이 대체로 태어난 나라에서 영구적으로 살고 혼인이나 귀화는 당사자들이 그 땅에서 영구적으로 살아가겠다는 의사를 드러낸 행위들이므로, 결국 국적의 취득은 그 땅에서 미래를 보내겠다는 의사의 표시다. 태어나는 사람에게 과거가 없고 혼인이나 귀화를 통해서 국적을 취득한 사람들의 과거를 묻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국민이 되는 요건이 과거가 아니라 미래임을 우리는 뚜렷이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미래에 있고자 하는 위치가 어느 곳이든, 그곳에 이르기 위해선 새로운 환경에 맞는 문화가 필요하다. 이미 사라진 환경에서 나온 문화적 전통에 눈길을 고정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득세하면,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제대로 다듬어내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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