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번째 마당 (동유럽의 향기-루마니아 브라쇼보 편 7/31-8/7) 굶주린 헝가리의 빈대들과 바퀴벌레들에게 몸 보시를 잘하고 나온 덕에 카라의 손은 연신 틈만 나면 허벅지를 파고 들어가 벅벅 긁어대느라 피멍이 맺혀있다. 덩달아 로자도 등에서 뭔가가 꿈틀꿈틀 기어 다니는 느낌 때문에 밤잠을 설친다. 게다가 함께 이웃하고 앉아 있는 터어키 남녀의 애정행각에 간밤의 피로에도 불구하고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이스탄불 출신이라는 히잡을 단정히 쓴 초등학교 여교사와 은행의 컴퓨터 엔지니어라는 남자가 옆에서 쪽쪽대며 에로영화를 찍어 대는데 정말 도저히 눈 뜨고 못 봐주겠다. 세 명씩 마주앉아 여섯 명이 함께하는 기차에서 공중예절은 도대체 어디 여행 갔다가 버리고 왔는지... 애정 표현은 개인의 자유라 하지만... 그것도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초등 교사가.... 아무리 불을 껐다고 해도... 거친 숨소리와 신음소리... 마치 여기가 그들의 사랑방인양 두 사람은 눈에 뵈는 것이 없는 것처럼 그들만의 열띤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카라의 헛기침에도 놀라기는커녕, 태연히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간 큰 두 남녀는 이곳을 빠져 나가고는 밤이 새도록 돌아올 줄 모른다. 이 몰지각한 두 남녀 때문에 터어키에 대한 점수가 형편없이 하락한다. 보스포러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동양도 서양도 아닌,
유럽도 아시아도 아닌 터어키는 동서남북의 교차 지역이라는 지정학적 조건들을 활용하여 이스탄불이라는 멋진 문화도시를 탄생시킨 반면, 동서남북의 천박한 문화도 함께 버무려진 오명도 안고 있어야 할 것 같다. 7월 30일 오후 7시 08분에 헝가리 데브레첸을 출발한 기차가 셜록이란 도시를 거쳐 국경을 넘어 루마니아 브라쇼보에 도착 한 것은 다음날 아침 7시 26분이었다. 콧노래가 흥겨운 택시기사의 친절한 안내로 도착한 곳은 짙은 비취색이 멋스러운 곡선을 자랑하는 코로아나호텔(Hotel COROANA) 이었다. 우린 이곳에서 무민족성 세계 에스페란토 대회 (SAT, 이하 사트 대회)가 열리는 오늘 7월 31일부터 8월 7일까지
머물게 된다.
 그제, 어제 부터 씻지도 못하고 더위와 혼잡과 짜증에 지칠 대로
지친 심신을 닦아내고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푹 자고 난 후 선명하게 들리는 한국말 ‘안녕하세요, 카라!’ 라는 소리에 두 눈이 번쩍 떠진다. 방문 저쪽에서 미카엘로의 천진난만 목소리가 들린다. 철부지 형이 말썽쟁이 동생을 객지에서 어쩌다 마주 친 것처럼,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움에 카라와 미카엘로는 서로 얼싸안은 채
팔을 풀지 못한다. 동지섣달 꽃 본 듯이, 오뉴월 가문 날에 빗발같이도 반긴다.
몇 년 전 한국에서 생활을 했던 미카엘로는 미국인으로서 러시아어, 일어, 중국어 등 약 7-8개의 언어에 능통한 에스페란티스토이다. 물 마시듯 자주자주 찾는 시원한 맥주와 역동적인 축구 경기만 있어줘도 사는 것이 행복하다는 그는 미 제국주의 음모 같은 영어의 전 세계화를 누구보다도 경계하고 증오한다. 그러므로 온 세상사람 모두 공정하게 배워야 하는 에스페란토가 세계 공용어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자기 살아 온 이야기만 펼쳐 놓아도 장편소설 10권 분량이 되고도 남는 다는 미카엘로와의 열렬한 환영인사를 뒤로하고 호텔 로비로 내려갔다. 그동안 아침 일찍 도착해서 세상모르게 잠을 자느라 이미 SAT대회 접수가 시작된 줄도 모르고 있었다. SAT(Sennacieca Asocio Tutmonda) 대회는 국가와 민족을 초월한 전 세계 사람들이 오직 평등과 평화의 언어 에스페란토로서 가슴을 열고 만나자는 국제적인 모임이다. 일체의 통역에 대한 수고로움과 비용이 필요 없는 이상적인 전 지구인 모임이다. 
전 세계 15개국에서 온 약 80여명의 에스페란티스토들이 고풍스런 루마니아의 문화 중심지 브라쇼보(Brasxovo)의 명문대학
‘안드레이 샤고나(Andrei Saguna)'에서 7박 8일간의 열띤 토론을 벌인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앳된 20대에서부터 백발이 성성한 80대 까지
온 세상의 부조리와 폭력에 맞서 싸우는 투사들처럼, 일당백하고도 남을 정열의 에스페란티스토들이 다 모인 것 같다. 물 흐르듯이 유창한 에스페란토 실력은 기본, 거기에다가 뚜렷한
자기의 세계관과 철학이 없이는 단상에 나가 말도 못 붙일 것 같은 분위기이다. 마치 모국어를 구사하는 것처럼 자유자재로 자기의 의견을 강약의 리듬에 담아, 때로는 격정적으로,
때로는 부드럽게, 언어가 음악이고 음악이 곧 언어인 것 같다. 8월 2일, 월요일 오후 3시, 평화 분과 모임을 이끌어가는 프랑스 여성 에스페란티스토는 꼼꼼한 자료 준비와 당신의 활동 상황을 함께 곁들여서 이 지구상의 잔인한 무기들을 생산하는 회사들을 고발한다. 그 회사들 명단에 우리나라의 한화, 풍산그룹의 존재는 SAT대회에 처음 참석하는 카라와 로자를 부끄럽게 만든다. 이어서 오후 5시45분부터 1시간 동안 “에스페란토를 통한 한국 과
일본 활동가들과 다른 사회조직들과의 협력(Kunlaboro per Esperanto i Inter aktivistoj de Koreio, Japanio kaj aliaj sociaj organizajxoj)"
이란 내용의 카라의 주제 발표가 진행되었다.
한국 에스페란티스토 최초로 SAT 심포지엄 발표를 하는 카라가 그동안의 활동 상황들을 사진과 함께 곁들여 설명하는 동안,
장내는 동양의 한 젊은이(여기 참석자들에 비하면...)의 거침없는 열변에 숨을 죽이고 지켜보다가, 뜨거운 박수로서 성원을 보낸다. 여기저기서 이어지는 질문공세들... 놀라운 한 · 일 젊은이들의 G8 반대 국제연대 투쟁과 평화 활동들을 문화축제 처럼 신명나게 풀어나가는 것을 보면서
다시 한번 환호를 보낸다. 저녁 8시 30분부터 펼쳐진 ‘문화의 밤’ 행사는 미래의 에스페란티스토 브라쇼보 지역 어린이들 20여명이 흥겨운 루마니아 민요로서 문을 열어 준다. 이들 노래 공연의 대미를 장식한 에스페란토로 번역한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 ‘합창’은 에스페란토가 세상의 평화를 실어 나르는 사자(使者)가 되어주길 기원하는 것 같았다. 이어서 피자도 아니고 먹자도 아닌 로자가 한 판 놀아보는데 이렇게 놀것다...얼씨구!! 
휘늘어진 부채 거머쥐고 상하좌우를 다니면서 훈수를 두는 양반춤에, 칭칭 감기다가도 척! 하고 사뿐 제자리 찾아오는 오색 찬란한 의상에, 절절이 애끓는 피리소리까지 가세하면서
200여명의 관객들을 축제의 절정으로 안내한다. 열띤 토론과 송곳 같은 갑론을박이 이어졌던 한낮의 긴장들을 싸악~ 풀고야 말겠다는 듯이, 연신 보내주는 힘찬 박수와 카메라 세례에 보답하기 위해 아리랑, 진도아리랑, 새타령으로
화답한다. 그날따라 수리 술술 잘 나오는 통성과 속청이 화려한 새타령은
많은 분들로부터 우리 소리의 섬세함과 깊은 맛, 오랜 연마를 필요로 하는 수준 높은 곡들이라며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준다. 8월 3일 화요일 대회 3일째, 평화활동에 있어서의 SAT 역할과 인종주의, 루마니아의 언어와 문화, 20세기 루마니아 노동자 활동 등 비교적 무겁고 민감한 주제의 포럼이 열렸다. 묵직한 주제에 반비례해서 무척이나 가벼운 무게를 간직하고 있는
듯한 멋쟁이 프랑스 갈비씨 형제를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형인 빈코(Vinko Markovo)와 동생 비토(Vito)는 부모님의 물려주신 가보마냥 SAT를 위해 무료 봉사로, 소식지 발간은 물론이며, 잡다한 일들을 도맡아 한다. 30대의 형 빈코는 늘어진 수염에 긴 머리, 호리호리한 기럭지가 마치 알프스 산에서 도를 닦다가 막 나온 듯한 모습이다. 웃는 모습을 대회 기간 내내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로자로서는 그의 헌신적인 봉사가 저런 진득함에서 나온 것이려니 하고 나름 추측한다. 
반면 20대의 동생 비토는 항상 싱글벙글, 금발의 짧은 웨이브를
이마 앞에 자존심처럼 살짝 세운 모습이 여느 프랑스의 발랄한
청년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틈만 나면 수첩을 꺼내들고 열심히 경청하는 참석자들의 옆모습을 볼펜으로 스케치하고는 본의 아니게 모델이 되어준 이들에게 수줍은 듯이 선물한다. 왜? 로자는 스케치 안했느냐고 물으니, 실핏줄이 다 보이는 희디 흰 피부가 붉어지면서, 카라가 자칫 오해할 수도 있을까봐서
안했다네...(...잉~, 카라는 오해는 커녕 육해, 칠해도 안함...) 부모님을 비롯하여 형제, 자매 등 온 가족이 에스페란티스토인
이들은 분명 SAT 회원의 모범적인 사례로서 연로해 가는 SAT에
희망동이로 자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심각한 포럼이 열리는 가운데에서도 웃음 짓게 하는 또 한 사람이 로자의 눈을 잡아 끈다. 그 이름은 야코보 슈램(Jakovo Schram). 다이어트에 실패한 아인슈타인이 미래에서 온 듯, 곱슬곱슬 자연스런 백발의 웨이브와 팔삭둥이가 들어앉아 있을 것 같은 남산 만한 배를, 체크 티셔츠로 감출 생각도 없다는 듯이 쑥 내밀고 활보하는 모습이 보는 사람 눈을 즐겁게 한다. 생기발랄한 목소리며, 까맣게 반짝이는 순박한 눈동자, 적극적인
손놀림으로 의사표현을 하는 그의 자태는 보기만 해도 무지무지
듬직한 것이, 엎어 놓으면 고스톱판으로 제격이요, 앞으로 제껴 놓으면 푸짐한 인정이 넘치는 밥집 아저씨 형상이다. 벨기에 출신의 야코보는 지금은 은퇴자로서 아내와 단 둘이서 행복하게 노후를 보내고 있지만 한때는 파산하여 거리 생활까지
해야 했던 힘겨운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잊을 수 없는 아픈 과거에도 불구하고 그의 해맑은 얼굴과 음성은 열정적인 토론의 진행자로서, SAT 위원회의 회장으로서,
무거운 몸에도 불구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오늘도 동분서주한다. 8월 4일 수요일 대회 4일째, 소풍을 기다려온 아이들 마냥 오늘은 즐거운 관광 가는 날이다. 브라쇼보에서 관광버스로 약3시간이 걸리는 이곳은 루마니아의 전설적인 에스페란티스토
안드레오 체(Andreo Csch)의 기념비가 있는
시비우(Sibiu)라는 곳이다. 
한 여름의 더위를 식혀주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가운데 도보 여행이 시작되었다. 이곳 건축물들의 특이한 것 중 하나는 붉은 기와 지붕 위에 설치되어 있는 창문들이 마치 사람이 눈을 크게 치켜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동유럽의 혹독한 겨울날씨 때문에 환기는 해야겠으나, 크게 문을 만들지는 못하고 최대한 온기를 보존하는 방법을 취한 것이란다. 멀리서 보면 거대한 지붕 유령이 큰 눈을 부라리며 오고가는 사람들을 노려보는 것 같다. 이어서 도착한 곳은 우리의 민속촌 같은 곳, 전통문명박물관 아스트라( Traditional Civilization Museum Astra). 울창한 숲길을 따라 들어가보니 루마니아 사람들이 사용했던 나무 풍차와 짚을 엮지 않고 차곡차곡 줄 세워 놓은 초가집들이
모여 있다. 해바라기 씨 기름을 짜는 도구들하며, 동네회의가 이루어진 듯한 널따란 흙 마당, 친절한 어느 한 거주민은 자기 집에 들어와서 사는 것 보고 가라고 카라의 손을 잡아 이끈다. 카라는 이곳에서 에스페란토 홍보 영화 촬영과 인터뷰에 응하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대동한 영화 총감독은 이번 참가자 가운데
많지 않은 애연가 중(80여명 중 겨우 3명)의 한 명인 카라와의 인터뷰를 동지애가 넘치는 표정으로 연신 진지하게 진행하였다. 마치 과부가 홀아비 심정을 아는 것처럼... 
강력한 자석을 붙인 듯이 우리 뒤를 졸졸 따라오는 검은 강아지의 옹아리 소리가 한결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준다. 이 녀석이 보아하니 사람들이 오면 입맛 당기는 것을 준다는 것을 이미 깨달았는지, 독한 담배 연기에도 아랑곳 않고 카라 옆에 벌렁 드러누워 갈 생각을 않는다. 원두 커피 한 알을 건넸더니 끙 하고 냄새 한 번 맡아보더니 주둥이로 획 내쳐버린다. 가진 것이라고는 커피와 담배 밖에 없었던 우리로서는 그 녀석이
알아 듣거나 말기나 순 한국말로 이렇게 전했다. 미안해, 하룻강아지... 니가 사람을 잘 못 보았어... 너의 안목과 후각을 좀 더 갈고 다듬어서... 다음번에는 가방 깊숙이 맛있는 것 숨겨 가지고 있는 사람을 콕 하고 찍어라~ 안녕...
지지배배, 개굴개굴, 수다쟁이들이 외국어를 잘 구사한다고들 하지만 올해의 수다 왕으로 로자는 주저 않고 우리의 뒷 자석에
앉아 있는 영국 에스페란티스토 데이빗 교수와 러시아 에스페란티스토 니콜라오를 강력 추천한다. 테너 수다쟁이와
베이스의 입담꾼이 만나 관광 떠나는 버스 안에서 3시간을 쉬지 않고 떠드는데.... 처음에는 에스페란토 듣기 공부 한다 샘치고 귀를 열어놓고... 거침없이, 시시콜콜한 것 조차 자유자재로 말하는 탁월한 그들의
에스페란토 구사능력이 마냥 부러웠다. 영국과 러시아의 국가 대표급 수다쟁이들의 주제는 정치, 경제, 요리, 담배, 심지어는 딸내미들의 학교생활 얘기 까지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데 1시간이 넘고 3시간이 되어가니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버스 안에서 잘 수가 있어야지..) 햇병아리 참석자(로자)가 무어라 제지 시킬 수는 없고 뒤 돌아서서 썩소(씁쓸한 미소...어이없어서...)를 날렸더니, 수다 불꽃에 기름을 부은 듯 더욱 활활 타오르는 그 둘의 높고 낮은 목소리가 관광버스를 달궈준다. 로자가 쳐다보면 쑥스러워서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내 미소가 그 둘에게 신바람만 안겨준 셈이 되었으니... 암튼, 그대 둘을 올해의 최강 수다왕으로 임명합니다!! 브라쇼보 시내 중심가를 가로지르는 수많은 파라솔과 벤취, 의자들에는 아침 저녁 할 것 없이 사람들로 꽉꽉 들어찬다. 흥겨운 음악이 언제나 거리에 넘쳐나고 밤마다 광장에서는 공연이 펼쳐지는 이곳은 짚시의 나라답게 온 정열을 다 바쳐 열연하는 그들에게 지폐와 동전을 아낌없이 건넨다. 
탭 댄스를 연상케하는 힘찬 발놀림이 경쾌한 루마니아 민속무용은 값비싼 비용을 지불해야만 하는 주점에서나 볼 수 있고, 길들여진 신명을 북돋우는 무희들의 표정에는 어색한 신바람만 넘쳐단다. 짜고 기름진 음식은 가격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어디에서나 만나게 된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거리 의자에 걸터 앉아 담배 한 대 꼬나물고 있는 모습은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흔한 풍경중 하나이다. 한 손은 유모차를 밀고, 또 한손은 담배를 피고 있는 황당한 경우들을, 호주를 거쳐 이곳에서도 종종 보게 되면서, 니코친의 치명적인 유혹은 모성애를 뛰어넘는 강력한 쓰나미로 이미 전 세계를 점령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7박 8일간의 루마니아 브라쇼보에서 열린 SAT대회는 온 인류가 하나라는 인류인주의를 기반으로, 온 세상의 전쟁과 부조리에 당당히 맞서서 행동하는 에스페란티스토이기를 소망한다. 세상의 평화와 평등을 추구하는 녹색 바람이 온 세상을 강타 할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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