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째 마당( 동유럽의 향기-불가리아의 플레벤 편 8/7-9/3) 루마니아 브라쇼보가 떠나 갈 것 같은 천둥 번개와 폭우가 간밤에 몰아쳤다. 뜨겁게 내리쬐던 햇살과 함께 SAT대회 7박 8일간의 일정을 마감하고 불가리아로 향하는 새벽길에 쏟아지는 장대비가 가지 말라고 울며불며 애원하는 것만 같다. 새벽 5시 21분 행 불가리아 플레벤 행 기차가 24분이나 늦은 5시 45분에 출발한다. 동유럽 열차가 시도 때도 없이 지연되고,
별다른 설명도 없이 지각하는 것에 대해 이미 그 악명을 듣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궁시렁 궁시렁 불평하는 사람도 우리 같은 여행자들 말고는 없는 것 같다. 더군다나 다음 정류장 예고 방송이 전혀 없어서 긴장해서 정거장 이름을 더듬거리며 잘 읽고 내리지 않으면 영락없이 낭패를 당한다. 38도가 넘는 한 여름에 에어콘도 작동하지 않고,
세계 각국의 글로벌한 쉬야 냄새를 14시간 정도를 꼬박 앉아서
맡아야 하는 그 고문은 참을 인자를 적어도 수 십 번은 들었다
놨다 해야 한다. 
여행 5개월째에 접어들면서 어디선가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미카엘로가 비어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푹 쉬다 가라고 제안한다.
그곳은 불가리아의 플레벤(Pleven)이란 조그만 소도시로서
관광객이라고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곳이란다. 우리는 거기서
몸도 마음도 쉬면서 재충전의 시간을 갖기로 결정하고 약 한 달간
기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8월 7일 새벽 4시 30분 식전 댓바람부터 꿈지럭 거리며 시작한
불가리아 여행이 그날 저녁 9시가 다 되어서야 드디어 플레벤에
도착하였다. 여기저기 장대비가 쏟아질 것 같은 조짐이 나타나더니
후두둑 소리와 함께 우리 부부를 머리에서 발끝까지 시원하게
씻겨준다. 침대와 쇼파, 식탁 외에는 거의 텅 비어 있는 그의 낡은 아파트에서
세 사람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여기 저기 금이 가고 곱디 고운
색깔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곳이지만 우리에겐 황금 궁전 이라
여기면서 고단한 우리의 짐 꾸러미를 내려놓았다. 아침 일찍부터 건물을 흔드는 포크레인 소리에 잠을 깨어보니
여기저기 리모델링이 한참인 곳이었다. 이웃하고 있는 세련된
신축 아파트와 우리가 머무는 구식 아파트가 얼굴을 맞대고
민망하게 바라보고 있다. 한 낮의 더위를 피해 이른 새벽부터 소란스레 무슨 일을 하나
보았더니 5층 아파트의 1층을 허물고 지하를 파고 있다. 이런
위험천만한 작업을 왁자지껄 몇 사람이 모여 아무렇지도 않게
흙덩이를 들어낸다. 아슬아슬하게 2층부터 5층까지 간당간당
달려 있는 것 같은데 이들에게는 전혀 위험하게 느끼지 않나 보다. 보고 있는 우리가 더 오금이 저린다. 
요란하게 쏟아지는 분수대를 중심으로 플레벤의 중심 기관이
다 모여 있다. 도청, 경찰국, 우체국, 전화국 등... 시내 한 복판에
울창한 숲과 벤취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앉아있다. 동양인을 처음
보는지 우리 부부가 지나가면 일동 모두 우리를 주목하는 데,
처음에는 뒤통수도 따갑고, 약간 두렵기도 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지나면서 간이 부었는지 오히려 그들의 동그란 눈동자에 담긴 호기심에 맞짱 눈길을 보낸다. 여기 머무는 약 4주 동안 딱 한번 동양인 인 듯한 부부 2쌍을
스쳐가듯 보고는 한번도 본적이 없었으니 이들의 놀라움을
이해 할 만 하다. 유모차에 누워 있는 어떤 애기들은 우유병을
빨다 말고는 구슬같은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리며 우릴 바라본다. 불가리아는 사회주의 체제 시절에는 중화학공업의 발전으로 다른 동유럽 국가들에 비해 잘 살았다고 한다. 이후 체제 전환기에 경쟁력을 잃으면서 번영했던 농업 조차도 국가 기간 산업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해 지금은 가난한 나라로서 낮은 출산율과 생산력으로 고통받고 있다. 
불가리아는 EU 가입 국가이지만 물가는 아주 싸서 우리 같은 여행자에게는 과일이며, 야채며, 쌀을 적은 돈으로 사다 먹을 수
있다. 이곳의 돈 단위는 레브(Lev)로, 1레브가 1/2유로로 웬만한 식료품들은 3-5레브면 풍족히 사 먹을 수 있다. 오랜 터어키의 식민지를 끝내고 사회주의 체제국가에서 개혁과
개방화시대의 면모를 갖추며 살아온 불가리아인들에게 있어서 아직도 구시대의 잔재들은 남아 있었다. 외국인이 2-3일 이상 자신의 집에 머물 때에는 반드시 관할 경찰서에 신고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민들의 감시 통제 시스템이 폐기 처분되지 않고
버젓이 오늘날에도 유통되고 있는 것이다. 여권을 들고 복잡한 문서를 작성하고 경찰서를 찾아가는데 미국인인 미카엘로의 증언만으로는 부족해서 불가리아의 주민인
로자(불가리아 에스페란티스토 클라리타의 어머니)의 보증이 필요
했다.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서 있는 여권 발급 신청소 옆에 위치한, 거동도 불편한 어르신을 오라가라하는 경찰서로 우리 네 사람이 들어섰다. 뾰족한 콧날에 치켜 올라간 큰 눈, 거기에다 신경질적인 목소리의 여직원이 우리 여권을 보더니 버럭버럭 소리지른다. 원래 포악한 사또보다 교활한 이방이 더 패주고 싶고, 탐욕스런 지주
보다 거기 빌붙어 먹고 사는 박쥐같은 마름이 더 목에 기브스하고
다녔던 것처럼... 정작 경찰관은 한마디도 않는데 이 앙칼진 여자가 우리 앞에서
목에 핏대를 세운다. 그런 꼬락서니를 그냥 보고 있을 리가 없는 카라가 한마디 한다. 에이, 그 X 꼴값하고 자빠졌네... 어차피 지나 우리나 무슨 말인지 이해 못하기는 마찬가지이고... 괜히 동양인 깔보는 듯한 주제넘은 여편네에게 우리도 한방 보기
좋게 펀치를 날렸다...ㅎㅎㅎ 로자(불가리아 에스페란티스토 클라리타의 어머니)는 고혈압으로
고생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부부를 식사 초대는 물론이요, 과일이며, 요구르트며, 불가리아 음식을 항상 봉지에
그득 그득 담아서 주신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그렇듯이 내 새끼도 객지에서 배고파 고생하고 있지 않나하는 안쓰러움에
우리 부부를 내 자식 보듯 챙겨주신다. 
한국에서 비싼 몸값을 주고 온 백설같이 하얀 고양이 돌체와 함께 살고 계신 로자는 손녀딸의 비극적인 죽음을 우리에게 제일
먼저 들려주셨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11살의 그녀가 비둘기를 구하려다 아파트 난간에서 추락사한 이야기를 불가리아 언어를 전혀 이해 못하는 우리에게 구슬프게 설명해 주신다. 집안 곳곳에 보석처럼 빛나는 외동 손녀의 햇살같은 미소가 집안 가득 걸려 있지만 할머니의 가슴속에는 아직도 매일 비가 내리고 있었다. 거의 매일 방콕(오직 쉬고 싶어서...)하고 있는 게으름뱅이 배! 째라 부부의 등을 떠밀면서, 보다 못한 미카엘로가 플레벤 시내 관광 가이드를 자청하고 나섰다.
헤이, 잠꾸러기 부부, 여기 잠자러 왔어요? (우리, 그냥 쉬게 나두세요, 제발...) 몸이 좀 안 좋아서... 이 핑계, 저 핑계... 요리 빼고, 저리 빼고... 그럴수록 운동을 해야 하고 많이 걸어야 한다면서 늘어져있는
우리의 손을 잡아 끈다. 멀지 않는 거리에 있다는 그의 설명에
명소 탐방길에 나섰다. 시내 분수대를 가로지르고, 불가리아에서
가장 큰 토종 브랜드 대형 슈퍼 빌라를 지나고, 태양을 피할 생각도 못하고 헉헉 대며 그의 뒤를 쫓아가는데 가도 가도 목적지가 안 나온다. 벌써 두 시간째 땡볕 도보 훈련이다. 에이, 뭐예요? 멀지 않다면서요... 폭염 속에서 극기 체험 정말 원치 않아요... 관광이고 나발이고 다 싫다니깐요... 우리에게 제발 휴식을... 투덜투덜 해봐도 미카엘로 들은 척도 안한다. 걸어서 왕복 4시간이 걸리는 이곳은 카이르카(Kajlaka)라는 저수지로 불가리아 살수대첩이 행해진 곳이다.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에 맞서 대승을 거두었다면, 불가리아는 이곳에서 토트레이번 장군 지휘아래 터어키 군대를 맞아 수공을 펼침으로써 자신의 조국을 구한 역사적인 현장인 것이다. 
드라마틱한 이 저수지는 파노라마(Panorama)라고 불리는 전쟁역사박물관과 함께 플레벤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로 플레벤
시민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추천하는 곳이다. 침략자 터어키군을 맞아 온 국민의 피 눈물로 이겨낸 전쟁사가
박물관 꼭대기 전층을 둥그런 벽화로 완전히 가득 채워져 있다. 서사적인 투쟁사가 그림으로 장대하게 펼쳐져 있어서
파노라마 라고 이름을 지은 것 같았다.
 불가리아 거리 곳곳에는 A4용지에 수 많은 사람들의 사진이 꽃과 함께 걸려 있다. 처음에는 무슨 선거 벽보인가 생각했다.
그것은 돌아가신 분들을 잊지 않기 위해 고인의 사진과 간단한
약력을 적어서 거리 곳곳에 붙여 알리거나, 대문에 붙여 놓는다고
한다. 요절한 애닲은 죽음에서부터 수명장수를 누린 별세까지... 생사를 초월하고, 떠나버린 분들과의 추억을 함께 잊지 않고 살아가는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8월 21일 토요일 아침 6시부터 불가리아 시민 공동묘지로 향하는
발길이 땀에 젖는다. 차도를 지나고 인도를 건너 산등성이 하나를
넘어서 도착한 곳은 클라리타 아버지 산소이다. 방에서 탱자탱자 빈둥거리고 있어서 안가겠다고 말도 못하고, 미카엘로 뒤꽁무니를
터벅거리며 따라간다. 이역만리 머나먼 땅에서 남의 딸 대신
효자 효녀 노릇 하기도 쉽지않다. 오늘은 클라리타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1주년이 되는 날이다. 영국서 바삐 지내고 있는 친딸 대신 딸 아들 역할위해
배! 째라 부부와 미카엘로가 추도식에 참석했다. 가족 친지들이
소리없이 울먹이는 가운데 조용하고 조촐한 의식이 진행되었다.
촛불을 밝히고 산소위에 포도주로 십자가를 그리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 신부님의 구슬픈 추모 송가는 미카엘로의 눈도 적시고, 배! 째라 부부도 연신 손수건을 꺼낸다. 이 세상의 모든 삶과 죽음의 의식에 담긴 의미가 먼저 가신 고인에 대한 통한의 아픔을, 남아있는 자들이 죄송함을 전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약 한달 간 불가리아 플레벤에서의 휴식은 또 다시 출발하는
긴 여행을 위한
귀중한 시간이었다. 아파트 앞 노점상 할머니들과의 즐거운
하이파이브 인사,
터어키식 카페 종업원 청년 레지와의 손짓 발짓 대화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북치고 나팔부는 흥겨운 결혼식 피로연에서 만난
동네 아주머니가 건네주신 달콤한 카라멜처럼 플레벤은 향긋한
기운을 우리 부부에게 안겨주었다. 게으름뱅이 배! 째라 부부에게 이 금쪽같은 재충전 기회를
제공해주신 카라의 영원한 에스페란티스토 철부지 엉아인 미카엘로에게 그저 고마울 뿐이다. 우리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지만 내일을 기약하면서 장미의 고장 카잔륵으로 아쉬운 발길을 돌린다.
|